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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Feb 25. 2021

퀴네페 한 입에 이스탄불 당일치기가 완벽해진다.

[맛있는 터키] #2 이스탄불 디저트 맛집, 사파 Safa (1/2)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것들의 총합 = 터키


나는 대체로 삶의 모든 면에서 지고지순형의 인간이다. 한번 마음을 연 사람에겐 먼저 등 돌리는 법이 없고, 한 번 사랑에 빠진 곳은 열 번 스무 번도 다시 여행하며, 새로운 맛집과 단골집 사이에선 망설임 없이 단골집으로 향한다. 물론 살다 보면 인연은 예고 없이 찾아오듯 예고 없이 떠나버리기도 하고, 단골집의 음식도 예전 같지 않아 오늘로 여기에 오는 것도 마지막이겠군 생각하며 쓴 입으로 가게를 나서는 일도 생긴다. 그러나 여전히 긴 세월 한결같이 내 삶에 머물러주는 이들이 있듯이 한결같은 맛을 고수하는 식당 사장님들도,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나를 맞아주는 나라들도 있다.


어쩌다 볼일이 있어 다른 지역을 들르게 될 때면 그곳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곤 한다. 긴 시간을 낼 수는 없어도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준다면 기꺼이 얼굴을 보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하루 종일 친구들과 함께이던 학창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어보니 관계의 지속은 순전히 쌍방의 지속 의지와 마음씀이 있어야만 가능하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삶에서 지켜내고 싶은 소중한 관계들처럼, 기회만 있다면 어떻게든 좀 더 자주 얼굴을 비추어 날 잊지 않아주었으면 하는 곳이 바로 터키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일이 생기면 곧장 터키 항공으로 들어가 항공편을 검색한다. 그리고 목적지로 운항하는 항공편이 있다면 경유지인 이스탄불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가장 긴 스케줄을 고른다.


그렇게 얻어낸 열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길이 머릿속에 훤한, 한 때 매일 걷던 이스탄불의 거리 곳곳을 누비며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호사를 누린다. 그리웠던 골목과 바다와 건물들과 고양이들에게 그리고 단골 식당 아저씨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오는, 새것은 들어설 자리도 없이 익숙한 것들로만 꽉꽉 채운 시간이다. 그리고 이 반나절짜리 여행은 언제나 내게 재충전의 시간이자 위로 그 자체가 되어주었다.




완벽한 데이트의 마무리는 달콤한 퀴네페로.


그렇게 이스탄불과 짧은 데이트를 누리게 될 때면 마지막으로 시르케지 역 근처에 있는 디저트 가게, 사파 SAFA에 들른다. 정성 들여 만든 그들의 디저트를 쌉싸름한 차이와 함께 먹고 나면 그야말로 마무리까지 완벽한 데이트를 한 것 같은 기분에 미련 없이 공항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였다.


세계 3대 미식 국가로 꼽히기도 하는 터키에서도 맛있는 음식이 가장 많기로 소문난 동부 지역의 도시인 가지 안텝Gaziantep에서 온 두 형제가 개업한 사파는 현재 그랜드 바자르와 탁심을 비롯한 이스탄불 중심지 곳곳에 매장을 가진 가게로 자리 잡았다. 2015년 이스탄불에 살 때만 해도 이렇게 큰 가게가 아니었는데, 역시 좋은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사람들이 알아주기 마련인가 보다.



사파에 얼굴을 비출 때면 아저씨들은 "호쉬겔딘!Hoşgeldiniz(잘왔네!)" 하고 외치며 두 손을 번쩍 든다. 이번엔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거냐고, 내가 더 이상 터키에 살지 않는단 걸 뻔히 알면서도,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나에게 좀 더 자주 놀러 오라며 매번 아쉬워한다. 그러면 나는 "알라 알라Allah Allah!"(한국어로 직역하면 신이시여(oh my God)라는 뜻이다. '아이고' '맙소사' 같은 느낌으로 자주 쓰이는 터키어 감탄사)를 외치며 말한다. "아이고! 내 캐리어가 비었는데 그냥 아저씨 중 한 명을 체코로 보쌈해가야겠네요!"


껄껄껄 웃어대는 주방의 아저씨들을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가면 2층 서빙을 담당하는 아저씨가 반색을 한다. 어떻게 지냈냐, 이번엔 얼마나 있다 가는 거냐, 한참 안부를 묻고 나서야 주문을 받는다. 물론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아저씨가 먼저 물으신다. "퀴네페 하나에 돈두르마 한 조각, 차이는 연하게. 맞지?" 그러면 나는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든다.



얇게 민 반죽을 수십 겹에서 수백 겹씩 쌓아 올려 만드는 터키 디저트 바클라바들이 입구부터 눈길을 사로잡지만, 내가 사파를 찾는 이유는 바로 퀴네페künefe다. 카다이프라는 얇은 실처럼 생긴 디저트용 면을 위아래로 깔고 그 사이에 치즈를 넣어 굽는데, 금속 접시 안에 담긴 퀴네페를 뜨겁게 달군 자갈 위에 올리고, 설탕 시럽이 자글자글 끓을 때 꺼내어 그 위에 터키의 아이스크림인 돈두르마나 카이막을 함께 올려 서빙하는 뜨거운 디저트다.


백종원 님이 출연하는 길거리 음식 프로에 터키가 소개되면서 카이막은 한국인들에게 꼭 먹어보고 싶은 터키 음식이자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물론 나 또한 카이막에 꿀만 있다고 해도 아침식사로 빵 한 바구니는 뚝딱 해치울 수 있을 만큼 카이막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뜨거운 퀴네페에는 카이막보단 돈두르마다. 거기에 가지안텝에서 가져온 피스타치오 분태까지 듬뿍 뿌리면 게임 끝!


입에 넣는 순간 달콤한 시럽 맛이 혀를 적시고 곧바로 얇은 카다이프 면발이 바사삭 바스러지면서 면발 사이에 있던 따뜻하고 쫀득한 치즈가 고소한 맛을 내는 퀴네페는 꼭 쌉싸름한 터키식 홍차 차이와 함께 먹어야 한다. 단맛을 희석해주는 차이를 호로록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또 금세 포크로 치즈를 돌돌 말아 한입을 넣게 되는,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는 건 불가능한 매력이 있다.



맛잘알의 민족 터키와 한국, 이래서 우리가 형제의 나라..?


터키에 처음 도착했던 2015년, 처음으로 퀴네페를 맛보았을 때 어딘가 이름도 맛도 익숙하다 싶었는데, 한참을 갸웃거리다 무릎을 탁 쳤다. 아! 쿠나파 كُنافة구나!


요르단에서 유학하던 시절이었다. 수도가 아닌 작은 도시에서 살다 보니 방과 후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학교 밖 작은 중심가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거나 군것질을 하고, 기숙사에 모여 앉아 카드 게임을 하는 게 전부였는데, 음식점들마저도 그리 많지 않아 식당은 예멘 음식점과 양갈비 집, 디저트로는 생과일 주스와 아랍식 단과자인 할와حلوى를 파는 가게를 번갈아 가곤 했다.


그때 먹던 디저트 중에 팔레스타인 스타일의 할와인 쿠나파가 있었는데 팔레스타인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요르단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메뉴였다. 다만 내가 퀴네페를 보며 단번에 쿠나파를 떠올리지 못했던 건 터키와 달리 중동에서는 쿠나파를 즉석에서 요리해 손님에게 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랍에선 주로 엄청나게 큰 둥근 쟁반에 쿠나파를 구워낸 후 손님이 원하는 만큼 뚝뚝 잘라 판매하다 보니(터키처럼 작은 접시에 구워 파는 곳도 있긴하다.), 내게 쿠나파는 아랍어로 디저트를 지칭하는 할와의 한 종류로만 기억되었을 뿐 따뜻하고 신선한 퀴네페를 보며 떠올릴 강렬한 존재감이 없었던 거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엔 뭘 해 먹지 고민하는 나를 보며 체코 친구는 고개를 젓곤 했는데(식욕이라고는 애초에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은 그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온 국민이 먹는데 진심인 한국인들만큼 터키 사람들도 음식을 대할 때는 세상 누구보다 진지하다. 그리고 그 진지함이 이 쿠나파를 따뜻하게 서빙되는 퀴네페로 업그레이드시켜버린 거다. 역시, 여러 의미로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가 맞다. 그렇고 말고.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바삭바삭 따뜻한 퀴네페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지금 프라한데, 이거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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