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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Feb 26. 2021

서른한 가지 맛에서 파는 피스타치오맛은 잊으세요.

[맛있는 터키] #3 이스탄불 디저트 맛집, 사파 Safa (2/2)




서른한 가지 맛 아이스크림이여, 피스타치오에 대한 오해를 책임져라!


터키어로 피스타치오를 안텝 프스특antep fıstık이라고 부르는데, 안텝의 땅콩, 뭐 이런 뜻이다. 견과류 이름 자체에 지역 이름이 들어갈 정도로 피스타치오는 가지안텝의 특산물로 통한다. 사파는 가게에서 사용하는 모든 피스타치오를 안텝 지역에서 공수하는 곳으로, 소위 '피스타치오 공포증'을 깨부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중동에 살기 전까지만 해도 내게 피스타치오는 이름만 들어도 얼굴이 찌푸려지는 혐오스러운 음식이었는데, 그 시작은 어린 시절 한국에서 맛보았던 서른한 가지 아이스크림 때문이었다.


주말에 가족끼리 나들이를 갔다가 엄마를 조르고 졸라 드디어 그곳에 들어가 보게 되었을 때, 가장 특별해 보이는 맛을 고르겠다 고민하는 나의 눈에 이름도 색깔도 낯선 피스타치오가 들어왔다. 싸구려 옥수수가루 콘이 아닌 단단한 와플 과자 콘 위에 올려진 초록색 아이스크림을 한껏 기대하는 마음으로 첫 입을 베어 물었던 나는 그대로 아이스크림을 발치에 토해내듯 뱉어버렸다. 마치 차갑게 얼린 로션을 입에 가득 넣은 것 같았다.


그렇게 미국산 서른한 가지 아이스크림으로 인해 나는 20년 가까운 시간을 설탕과 향료와 색소로 이루어진 그 인공적이고 역겨운 향과 맛이 피스타치오라는 견과류의 맛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런데 중동에서 처음 피스타치오 견과를 맛보았을 때 악몽같이 기억된 그 맛과 너무 달라 검색을 해보았더니, 싸구려 아이스크림이나 디저트를 만들 때 고가의 피스타치오 견과 대신 아몬드 페이스트에 색소와 향료를 섞어 '가짜 피스타치오'맛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그때서야 퍼즐이 맞춰졌다. 종종 운 나쁘게 초콜릿 속에 숨겨진 싸구려 마지팬 Marzipan을 깨물었을 때 나던 바로 그 맛과 같았다. 


이제는 내 인생 최애 견과류가 되어버린 피스타치오가 오해를 받을 때면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이런 경험을 한게 나뿐만이 아닐 줄이야! 종종 피스타치오 얘기가 나올 때면 같은 경험을 한 동지들을 무리 속에서 꼭 한 명쯤은 만나곤 했는데, 여전히 피스타치오에 대한 편견과 끔찍한 경험을 떨쳐내지 못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마다 인공향료와 색소로 완성된 가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에 크게 데인 그들을 죄다 터키로 데려와 사파의 디저트를, 터키의 피스타치오를 맛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여러분, 피스타치오를 미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먹은 건 피스타치오가 아니었어요!



피스타치오와 카이막, 고급진 맛의 끝판왕. 카트메르.


일행이 있어 하나 이상의 메뉴를 선택할 수 있거나 여러 번 방문할 수 있는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디저트 두세 개는 혼자서도 거뜬하다면 퀴네페 외의 또 하나의 사파 대표 메뉴를 추천한다. 바로 카트메르 Katmer다. 이 디저트를 한 입 먹고 나면 작은 초록색 견과류가 얼마나 고소하고 깊은 맛을 가졌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왼쪽이 돈두르마를 올린 퀴네페, 오른쪽이 카트메르다.


속이 비칠 정도로 얇게 밀어낸 반죽 위에 보드랍게 간 피스타치오 가루와 카이막, 설탕을 뿌리고 다시 반죽을 덮어 구워내는데, 그 위에 다시 피스타치오 분태를 올리면 속을 감싸는 아주 얇은 피를 제외하고서는 음식을 구성하는 80%가 순수 피스타치오뿐인 고급 디저트, 카트메르가 완성된다. 사실 입에 넣으면 밀가루 반죽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구워내는 과정에서 부드럽게 녹은 설탕과 카이막이 뒤엉켜 연유 같은 맛을 내고, 거기에 고슬고슬한 피스타치오가 되직하게 섞여 씹는 재미를 준다.


가지안텝에 갔을 때 처음 맛본 후 카트메르가 종종 생각나곤 했는데 아쉽게도 이스탄불을 포함한 다른 도시 그 어디에서도 안텝 현지에서 먹었던 그 맛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사파의 메뉴에도 카트메르가 떡하니 있을 줄이야. 사파에선 매번 메뉴판을 볼 생각도 않고 퀴네페만 찾던 내가 카트메르의 존재를 알아챌 재간이 없었던 거다. 역시나 가지안텝 출신이라는 사실을 내걸고 운영하는 가게답게 사파의 카트메르는 현지에서 맛봤던 그 맛과 똑같았다. 행복한 고민이 하나 늘어버렸다. 이제 사파에 올 때면 카트메르와 퀴네페를 놓고 매번 고뇌에 빠지게 됐으니.


이렇게 떡하니 메뉴판에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눈 뜬 장님이 따로 없었다.


줄까 말까 장난치던 이태원의 아이스크림은 잊으세요.


마지막으로 자랑하고 싶은 사파의 숨은 메뉴는 케스메 돈두르마 Kesme dondurma다. 잘라먹는 돈두르마라는 뜻인데, 칼로 잘라먹어야 할 만큼 단단해서(하지만 입에 녹으면 곧바로 녹는다.) 썰어 먹을 수 있는 칼과 포크가 함께 서빙되는 재미있는 아이스크림이다. 사파에서는 여기에 어김없이 피스타치오를 뿌려 내어 주는데, 나는 퀴네페와 카트메르에 꼭 얹어먹거나 배가 부를 땐 아이스크림만 하나 시켜 먹고 오기도 할 정도로 좋아한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진 터키 디저트 브랜드인 마도 Mado보다 사파의 돈두르마가 몇 배는 더 맛있다.



사실 돈두르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터키 아이스크림은 가지안텝과 가까운 카흐라만마라쉬Kahramanmaraş라는 지역에서만 생산되는데, 그래서 현지에선 마라쉬 돈두르마 Maraş Dondurması라고 부른다. 염소와 양 젖에 매스틱 Mastic이라는 식용 가능한 천연수지와 야생난의 일종인 살렙 Sahlep의 뿌리를 함께 넣어 그 특유의 쫀득함이 만들어지고, 이 혼합물을 얼리는 과정에서 여러 번 젓고 또 치대어서 점성을 강하게 만들면 우리가 아는 돈두르마가 나오게 되는 거다. 혼합물을 통째로 얼리면 길거리에서 콘 위에 뚝뚝 떼어 얹어주는 돈두르마가, 네모난 틀에 넣고 얼리면 사파에서 파는 잘라먹는 케스메 돈두르마가 된다.


터키 여행을 할 때 한 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심지어 서울 이태원만 가도 만날 수 있는 터키 아이스크림 돈두르마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바로 아이스크림을 손님에게 건네주는 방식 때문일 거다. 돈두르마의 점성을 이용해 아이스크림을 건네 줄듯 말 듯 한참 약을 올리고, 손에 쥐어주었던 아이스크림을 다시 빼앗아가기도 하는데 장난기 많은 터키 사람들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들만의 아이스크림 판매법은 함께 웃고자 하는 의도와 달리 종종 손님의 빈정을 상하게하거나 꼬마 손님의 눈물을 터뜨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이런 퍼포먼스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무거운 아이스크림을 쇠막대 하나로 들었다 뒤집었다 할 수 있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고,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이 파는 돈두르마가 얼마나 쫀득한지 손님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으니 혹여나 돈두르마 퍼포먼스에 휘말리게 된다면 기꺼이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 나는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나는 사파에 간다. 퍼포먼스라면 이미 지난 6년간 충분히 당해(?)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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