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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Mar 14. 2021

터키 동부에서 인생 커피를 맛봤다.

[맛있는 터키] #4 피스타치오 커피,메넹기츠(1/2)




바다와 이별할 시간이 필요해


지중해의 완벽한 햇살과 바다와 이별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륙 국가 체코에 살기 시작한 지 2년 차, 마음 같아선 20일간의 휴가 전부를 터키의 지중해 도시들을 떠돌며 보낸대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매번 동부 여행을 미루고 미룬 게 대체 몇 번째인지. 터키에 살던 시기를 빼더라도 터키에 온 것만 이번으로 벌써 여섯 번째인데 부끄럽게도 나는 단 한 번도 바다를 등지고 동부로 떠나질 못했다.


이번엔 반드시 가야만 했다. 이번에 터키에 오면 만나자고 약속한 친구가 있었고, 그는 내가 터키에 도착한 날부터 그의 고향인 샨르우르파에서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사오일 정도로는 일 년 간 꾹꾹 눌러오던 나의 바다 앓이가 해소될 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한나절도 꼬박 더 걸리는 안탈리아 - 샨르우르파 여정이 너무 고될 것 같다는 핑계로 안탈리아에서 고작 서너 시간 떨어진 알란야 Alanya로 갔다.


안탈리아와 이름도 비슷한 알란야에 나는 적잖이 실망하고 말았다. 터키의 값싼 물가와 푸른 지중해 해변, 그들의 나라에선 보기 힘든 강렬한 태양을 찾아 몰려든 어마어마한 수의 러시아인 휴양객들을 수용하는 것이 현재의 가장 큰 존재 목적이 되어버린 듯한 알란야의 도시 곳곳은 시간에 쫓겨 겨우 지어낸 아파트 모델하우스처럼 어딘가 어설펐다.

터키의 옷가게에 러시아어 안내판이라니. 이 도시의 주요 관광객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뻔하다.

어찌 되었든 바다에 미련을 못 버린 내가 머리를 굴리고 굴려 선택한 곳이니 물놀이나 실컷 즐기자 싶었다. 이틀 뒤 샨르우르파까지 한 번에 이동하기엔 열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라 조금 더 가까운 가지안텝으로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동부에 가면 가지안텝은 꼭 들러야 한다고 동생이 신신당부를 했던 터라 가지안텝에서 당일치기 여행을 하고 저녁 버스로 곧바로 샨르우르파에 도착하는 것으로 친구와 상의를 끝냈다.


동부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바다이자 이번 휴가의 마지막 바다, 결국엔 올해의 마지막 바다가 될터였다. 숙소 직원에게 부탁해 보트 투어를 예약하고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들과 장소들을 물었다. 지중해에 둥둥 뜬 정박한 보트에서 쉴 새 없이 다이빙하며 물놀이를 하고 뭍으로 돌아와 또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머리카락에 소금기가 가실 새가 없었다. 끼니마다 로컬들이 가는 수산물 시장에 가서 새우와 생선으로 배를 가득 채우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틀도 금세 흘러버렸다.


이렇게 큰 배를 타고 지중해로 나가 온종일 수영하고 선탠을 즐길 수 있는 관광 상품 보트 투어. 깊은 지중해를 즐기는데 최고의 방법이라 터키 남부에 갈 때면 꼭 예약한다.
지중해는 수온이 따뜻해서 물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해산물을 시키면 꼭 함께 나오는 채소 로카. 우리가 잘아는 루꼴라다. 다만 한국이나 유럽에서 샐러드로 먹는 베이비 루꼴라보다 잎이 크고 매운 맛이 강해서 해산물과 찰떡이다.



처음인데 어딘가 익숙한 그곳, 터키 동부.


드디어 바다에게 작별을 고하고 동부로 떠나는 날. 터키 남동부에서 마지막으로 바다와 맞닿은 도시, 아다나를 경계로 서서히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요르단에서 유학하던 시절 언제나 창밖으로 보았던 익숙한 풍경이었다. 고등학교 세계지리 시간에 열심히 외우던 사막 기후를 떠올리게 하는 건조한 황야를 달리고 달리다 보니 도로 표지판에는 익숙한 아랍어가 쓰여있었다. 시리아 국경까지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가지안텝에 도착하니 자꾸만 이전에 와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건물부터 길거리, 도시의 분위기가 터키의 서쪽 끝 이스탄불보다는 여느 중동 국가의 모습과 훨씬 닮아있었다. 히잡을 쓴 여인들도 훨씬 많이 보였고, 높은 온도에 숨이 턱턱 막히는 공기에서부터 보수적인 중동의 냄새가 실려오는 듯했다. 중동을 떠난 후 마음 한 곳에 항상 품고 있던 그리움이 무색하게도 쉽사리 다시 돌아갈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터키에서 마주한 중동의 분위기가 나를 설레게 했다. 집에 돌아온 듯 모든 게 반가우면서도 내가 알던 터키와는 너무나 다른 이국적인 모습에 연인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돌무쉬(여러 사람이 타고 내리는 미니버스)가 내려준 곳은 여전히 구시가지와는 거리가 멀어서 우리는 천천히 주변을 구경하며 구도심을 향해 걸었다. 중고 휴대전화들로 진열대를 가득 메운 휴대전화 판매점, 착즙기 앞에 무더기로 쌓인 오렌지가 툭하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주스 가게, 찻잔을 앞에 두고 보드게임에 열중한 할아버지들이 자리를 지키는 구멍가게, 모든 게 정겹고 익숙해 마치 요르단의 한 골목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함께 걷던 친구에게 말했다. 설사 이 도시에 특별할 게 없다 해도, 어떤 새로운 것도 찾지 못하더라도, 아주 짧은 이 타임머신을 탄 듯한 경험만으로도 난 이 도시에 온 이유가 충분할 것 같다고.

터키어 간판만 아니었다면 요르단이나 이집트의 여느 거리라 해도 믿었을 풍경.



더워 죽어도 맛봐야 한다는 커피


"터키쉬 커피? 이 날씨에? 진심이야?"


평소에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 친구는 40도를 가뿐히 넘긴 가지안텝의 구시가지 골목을 걷다가 멈춰 내게 되물었다. 나는 우리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애써 외면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 동생이 이건 꼭꼭 꼭! 마셔봐야 한댔거든."


피스타치오의 도시 안텝에서 유명한 바클라바 가게에서 바클라바도 한 조각 먹고, 동생이 꼭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피스타치오 가득한 카트메르도 먹었다. 가지안텝에 도착한 이후 몇 시간째 다디단 디저트만 먹고 있는데도 각각의 메뉴가 가진 훌륭한 맛에 질릴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직 동생의 미션 하나가 남아있었다. 뜨거운 여름이어도 꼭 마셔야 한다는 이 지역만의 커피 한 잔 이란다.


가지안텝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이자 바클라바 가게 이맘 차으다쉬 İmam Çağdaş의 피스타치오 바클라바. 안텝의 피스타치오로 만든 바클라바는 그야말로 전국 최고다.
카트메르에 필요한 재료. 카이막, 피스타치오,  설탕. 따뜻한 카트메르에 우유 한 잔을 곁들이면 머리 위에서 팡파레가 터지는 것 같다.


가게로 들어서니 구수한 냄새가 뜨거운 공기에 실려 훅 끼쳤다. 분명 커피라고 했는데 외가댁 근처의 방앗간에 가면 나던 냄새였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곧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고, 우리는 메넹기츠 피 한 잔과 사데 소다(탄산수) 두 병을 시켰다. 곧바로 그는 우리가 주문한 차가운 탄산수 두 병과 함께 작은 주전부리를 들고 왔다. 주전부리는 볶아낸 견과류와 곡물 같았는데 병아리 콩처럼 익숙한 것도, 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 하나씩 입에 넣고 꼭꼭 씹으며 맛을 보는 사이 한 직원이 쟁반 위에 커피 여러 잔을 들고 서빙 홀로 들어오더니 우리 테이블에도 재빠르게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떠났다.



가게의 이름이 각인된 수제 컵 안에 담긴 메넹기츠 커피는 우윳빛 거품이 표면을 덮은 것 말고는 터키쉬 커피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앙증맞은 손잡이를 잡고 후 불어 한 김을 식힌 뒤 조심스레 한 모금을 후룩, 들이켰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도 못한 맛에 너무 놀라 헛웃음이 나왔다.


와, 이건 대체 뭐지???? 감동스러운 맛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40도를 웃도는 여름에 마시는 뜨거운 커피가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다고??


내가 아는 터키시 커피가 아니었다. 씁쓸한 맛을 설탕으로 중화시키는 터키시 커피와 다르게 첫맛부터 고소하고 달짝지근했는데, 흡사 율무차와 커피를 섞은 것 같았다. 피스타치오를 꼭꼭 씹는 듯 정말이지 고소하고, 고소하고, 또 고소했다. 평소엔 커피라곤 입에도 대지 않는 친구는 내 반응을 보더니 슬쩍 컵을 들고서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아주 조금을 들이켰다. '홀짝'. 생글거리며 내가 물었다. "어때?"


그의 눈썹이 아주 잠시 씰룩 올라갔다 내려왔다. 대답이 없던 그는 몇 초쯤 지난 후에 말했다.

"나도 한 잔 시킬래."


아, 이 놀라운 커피의 맛은 몇 시간 후에 이 도시를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우리가 한 잔만 마시고 떠나기에는 억울할 정도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우리는 커피 두 잔을 새로 시켰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 나에게 가지안텝 하면 메넹기츠 커피가 떠오를 거다. 아무런 새로움과 만나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던 내가 한 시간 전에 했던 그 말, 취소, 완전 취소다!





메넹기츠에 앞서 터키쉬 커피부터 말하자면.


사실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카페가 문을 연 곳이 터키다. 터키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이스탄불에 1550년 세계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인데 에티오피아에서 홍해를 사이에 두고 코 닿을 거리인 예멘을 통해 15세기경 중동으로 커피가 전파되었다. 그래서 전 세계 거의 모든 언어에서 커피를 뜻하는 단어가 아랍어 단어 까흐와قهوة에서 비롯되었다. 영어로 커피 Coffee, 터키어 카흐베 Kahve, 프랑스어 카페 Café처럼!


당시 중동에 커피가 전파되었을 때만 해도 커피콩을 오랫동안 물에 담가 우려낸 물을 마시거나, 조금 더 발전해서는 커피콩을 볶은 후 통째로 물과 끓여 마시곤 했다.(참고로 아랍식 커피에는 카르다몬 등의 향신료가 들어가는데, 내 입맛엔 맞지 않아 중동에 살면서도 두어 번 맛보고 말았다.) 그러다 당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었던 지금의 터키로 커피가 전해지면서 터키 사람들이 이 커피콩을 곱게 갈아 물과 함께 끓여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마시는 음료로써의 커피의 역사가 시작된 거다. 세계적 유행을 몰고 왔던 달고나 커피와 비엔나보다 맛있었던 쫀득한 크림을 가득 얹은 한국식 아인슈페너가 떠오른다. 맛있는 걸 더 맛있게 만드는 일이라면 두 민족 전부 진심이다.


길쭉한 손잡이에 뚜껑이 없는 편수냄비인 제즈베. 영어권이나 서양에선 이브릭이라고도 부른다.


터키쉬 커피는 제즈베 Cezve라는 주전자에 커피 가루를 넣고 물과 함께 끓여 그대로 잔에 담아 손님에게 대접한다. 가루와 함께 끓이는 이 추출법을 달임 식이라고 부르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추출방식이다. 이후 비엔나 정복에 실패한 오스만 군대가 두고 간 커피콩 포대로 비엔나에 첫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베네치아에도 커피가 소개되며 이 두 도시를 통해 지금의 에스프레소, 프렌치 프레스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추출된 유럽식 커피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커피 브랜드인 율리우스 마이늘 로고가 터키모자를 쓴 소년이다.)  


아, 메넹기츠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는데 벌써 글이 이만큼이나 길어졌다. 어쩔 수 없지, 다음 편으로 넘기는 수밖에.


율리우스 마이늘 로고. 공식 웹사이트 참조 ⓒJulius Mei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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