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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Mar 21. 2021

파오차이 아니고김치,메넹기츠아니고쿠르디쉬.

[맛있는 터키] #5 피스타치오커피,메넹기츠(1/2)




피스타치오의 수도엔 피스타치오 커피가.


카페를 나오는 내 손엔 메넹기츠 커피 두 통이 들려있었다. 사실 터키식 커피는 제즈베 Cezve부터 커피가루까지 전부 현지에서 공수해야 하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어서 가끔 터키에 와서 마시는 걸로 이제껏 만족해왔는데 제즈베도 없으면서 덜컥 커피가루부터 사버리고 말았다. 첫눈에 반해버린 메넹기츠 커피와 너무 빨리 이별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인스턴트 커피 두 통으로 달래본다. 드디어 샨르우르파로 가야 할 시간이다.



가지안텝의 버스 터미널은 어딘가 익숙했고 그래서 사랑스러웠다. 나는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어김없이 다른 지역에 있는 친척이나 친구 집으로 혼자 놀러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들르던 십수 년 전의 한국의 시외버스 터미널의 분위기와 냄새가 이곳에서 훅 끼쳐오는 듯했다. 가판대 위에 있어야 할 어묵과 오징어, 군밤 대신 피스타치오와 바클라바가 진열돼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짐 끄는 소리 등 각종 소음들은 건물 벽 이곳저곳에 부딪쳐 울려 퍼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공간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고, 나는 터미널 한 바퀴를 돌며 그 익숙한 분위기를 음미하고 또 음미했다.


그야말로 활기가 흘러넘치는 터미널의 소음을 배경음악 삼고 의자에 앉아 메넹기츠 커피를 검색했다. 피스타치오가 들어간다는 것 외엔 아는 게 없어 간단한 정보를 파악하고자 했을 뿐인데 의외의 검색 결과가 나왔다. 메넹기츠 커피에 들어가는 피스타치오는 내가 아는 피스타치오가 아니고, 메넹기츠 커피엔 커피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단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람?


한국의 터미널이 생각나던 가지안텝 버스 터미널. 가판대에 가면 뜨끈한 어묵과 달걀을 팔고 있을 것만 같다.
막상 상점에 가까이 가보면 팔고 있는 건 죄다 피스타치오!
나는 안텝의 피스타치오보다 맛있는 피스타치오는 먹어본 적이 없다.



피스타치오 커피, 너의 진짜 이름은.


검색 결과 창엔 까만 후추 알 같은 열매 사진이 주르륵 떠올랐다. 어딘가 낯이 익다. 순간 아까 카페에서 주전부리로 내놓았던 볶은 견과류 모둠이 생각났다. 그중에서도 꼭 후추 알처럼 생겨서 의아했던 그 알맹이들. 바로 이 녀석이었구나! 분명 하나쯤 손으로 집어 맛을 봤을 텐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인지 당최 그 맛이 생각나지 않는다. 수년간 가이드로 일하며 매번 깨닫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아는 만큼만 보이고 즐길 수 있다는 것. 메넹기츠 커피의 주재료를 눈 앞에 두고도 몰랐다니, 괜스레 아쉬운 마음도 커지는 기분이다.



이 까만 열매가 열리는 테레빈 Terebinth이라는 이름의 나무는 피스타치오과에 속하다 보니 그 열매를 야생 피스타치오로 부르는 것 같았다. 야생 피스타치오를 덖어서 절구에 넣고 곱게 빻아만든 진반죽을 우유와 설탕과 함께 넣고 끓이면 커피 한 방울 들어가지 않는 메넹기츠 커피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럽에서는 커피의 대체제로 소비되기도 했다. 그러면 왜 메넹기츠는 메넹기츠 '커피'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메넹기츠 커피의 기원은 20세기 초, 처음 이 음료가 유럽에 전파되었을 때의 이름을 보자마자 그 기원이 명확해졌다. '쿠르디쉬 커피', 즉 쿠르드 족의 커피다. 쿠르드족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가장 대표적인 나라 없는 민족(Stateless nation)이다. 내가 사는 체코의 인구가 고작 천만명, 옆 나라 오스트리아가 구백만이 채 안 되는 나라임을 감안하면 쿠르드 족은 집계된 인구만 무려 사천오백만 명에 가까워 하나의 국가로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만치 큰 민족이지만, 주변국과 서방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1차 대전 이후 민족이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다. 내 민족이 각종 사전과 인터넷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가 없는 민족'으로 정의되는 현실을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상상만 해도 울컥, 설움이 치민다.


과거 오스만 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쿠르디스탄'으로 자리하던 그들의 영토가 현재 터키의 남동부 지역과 시리아 국경, 이란, 이라크 산악 지대 등에 걸쳐져 있었다 보니 쿠르드족의 약 45퍼센트에 달하는 인구가 터키에 둥지를 틀고 있다. 동쪽으로 갈수록 터키어를 쓰고 터키 국적을 가졌지만 본디 쿠르드족인 사람들의 비율도 더 높아진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선 그들의 선조들이 쭉 살아오던 곳에 계속 사는 것뿐인데, 나라의 이름이 바뀌고 공용어가 바뀌고 자신들의 위치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프랑스에 판매되던 쿠르디쉬 커피 라벨. 한때 쿠르디쉬 커피는 파리의 카페들에서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kurdistan-au-feminin.fr


바로 이 쿠르드족이 한 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산악지대에 살며 야생에 있던 테레빈 나무의 열매를 따서 만들어 마시던 음료가 바로 께흐웨 쿠르디 Qehwe Kurdî 혹은 께흐웨 케즈완Qehwe Kezwan으로 불리던 쿠르드족의 커피다. (케즈완Kezwan은 쿠르드어로 테레빈 나무를 뜻한다.)  하지만 쿠르드족의 민족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그들의 언어와 의복, 음악 등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했던 터키 정부가 쿠르디쉬 커피라는 이름에서 쿠르드를 쏙 빼내고 테레빈 나무의 터키어 명칭인 멜렝기츠melengic에서 따온 메넹기츠menengiç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쿠르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 지금의 가지안텝을 포함해 디야르바키르, 하산케이프, 샨르우르파 등의 남동부 지역이고 이곳의 과거부터 쿠르드족이 살던 지역임을 감안하면 여전히 가지안텝은 메넹기츠 커피의 고향에 해당한다. 다만 승자에 의해 쿠르드족의 것이었던 음료는 이름조차 바뀌었다. 터키의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나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이 무겁다. 쿠르드 족을 생각하면 내 민족의 정체성과 언어를 부정당해야만 했던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가 자꾸만 떠오른다. 쿠르디쉬 커피, 혼자 조용히 커피 아닌 커피의 진짜 이름을 말해본다.


피스타치오 듬뿍 올라간 커피 한 모금에 피스타치오 듬뿍 끼워넣은 무화과 한 입을 쏙. 터키 동부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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