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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Apr 11. 2021

하얀 파도가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을 가득 채웠다.

[프라하 일기] 체코에서의 코로나 시대 1년




올해 체코에는 유난히 일찍이 봄이 찾아왔다. 체코에선 봄 날씨를 '여자의 마음'과 같다고 표현하곤 한다. 봄기운 완연한 듯 푸른 하늘을 보여주다가도 한 시간 뒤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선사하는, 하루 안에 사계절을 모아둔 것 같은 날씨의 변덕스러움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새파란 하늘이 창 밖을 채우고 있었다. 당장 내일 비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대충 아침을 때우고 얼른 집을 나섰다. 까를교를 건너,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매일 같이 손님들과 함께 누비던 구시가지 골목을 지나 광장에 다다랐다. 내일 비가 온다면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어젯밤 뉴스에서 보았던 특별한 십자가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2021년 3월 22일,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을 분필로 그려낸 십자가들이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겨울이 채가시지 않았던 작년 2020년 3월 1일, 공식적인 체코의 첫 감염자가 발생하였으니 코로나와 함께한 지 만 일 년 하고도 한 달이 다 되어가던 참이었다. 체코에서 지난 일 년간 코로나로 사망한 이만오 천명의 사람들을 뜻하는 이만 오천 개의 십자가였다.


유럽의 모범 방역 국으로 시작해 작년 여름을 직후로 전 세계에서 인구당 최다 감염률을 기록한 국가로 추락한 체코에서는 하루 이만 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매일마다 추가되었고,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되지 않던 막연한 숫자도 시간이 갈수록 처음 그 충격은 사라지고 그리 놀랍지 않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병상이 부족해 환자들을 이웃나라 폴란드와 독일로 이송하는 상황이었으니, 사망자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 또한 그리 새삼스러울 리가 없었다.


그렇게 타인의 죽음에 무뎌진 무심한 내게, 뉴스를 통해 비추어진 광장의 십자가 또한 막연한 상징적 장소에 지나지 않았었다. 고작 몇 달 전만 해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정부의 코로나 관련 규제에 반대한다며 경찰과 무력충돌까지 일으켰던 '바로 그 구시가지 광장'에 꾸려진 코로나 희생자를 위한 추모 공간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마주한 광장에서 하얀 십자가들 사이를 걸었다. 따사로운 봄 햇살에 적당히 달구어진 십자가의 물결 속을 걸으며 띄엄띄엄 놓인 양초와 꽃 그리고 분필로 쓰인 누군가의 글을 읽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찾아와 남기고 간 흔적이었다. 고요하던 물결이 내게 달려와 철썩하고 나를 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리보르, 철썩


할머니 다샤, 철썩


엄마, 인드르지스카, 철썩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이름 앞에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가 붙는 순간 그들의 죽음은 뉴스 속 숫자가 아닌 한 인간의 죽음이자 한 가족의 상실이 되어 나에게 밀려와 가슴 깊은 곳을 울컥 들어 올렸다. 이 십자가들의 진짜 의미가, 그 진실의 무게가 나를 압도했다. 

'아, 여기 이 이만 오천 개의 십자가는 단지 이만 오천 개의 십자가가 아니었구나.'

나의 할머니, 나의 엄마가 떠올랐고 하늘에 계신 보고 싶은 나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철썩


우리의 사랑, 할아버지 얀, 철썩


형제 프란티셱, 철썩



자꾸만 몰려드는 파도에 결국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만 오천 개의 십자가들이 하나 둘 일어나 내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광장 위에 그려진 이만 오천 개의 말 없는 십자가에는 각각 붙여질 그 이름 모를 이름들과 얼굴모를 얼굴들을 떠올렸다.


죽음이란 분필로 그려서 기억하기엔 너무 무거운 것이라, 십자가 행렬의 그 어딘가부터 십자가들은 래커 스프레이로 그려져 있었다. 관광객들이 하나 둘 다시 찾아와 언제 그랬냐는 듯 이 광장을 예전처럼 가득 채울 그날에도 아마 여기 이만 오천 개 중 적어도 하나의 십자가는 이 광장 위에 여전히 남아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오랫동안 우리의 2020년과 2021년을, 코로나 대유행의 시대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북적이는 군중이 만들어낸 인파와 이 하얀 십자가들의 물결을 기억할 것이다.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을 뒤덮었던 두개의 파도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 훗날 프라하를 오게 된다면, 많은 이들의 발길에 닳아 희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십자가들을 찾아보면 좋겠다. 꽃도 양초도 필요 없이, 작은 마음 한 조각 떼어 두고 오면 좋겠다.


p.s. 글 속에 미처 다 엮어내지 못했던 이들의 이름과, 그날의 사진들을 덧붙입니다. 



맥주를 좋아했던 그/그녀를 위하여.
(왼쪽부터 순서대로) 엄마/할머니/아빠
사랑하는 우리의 할머니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광장을 떠나기 전 여러 의미를 담아 나의 마음을 남겼다. 모두의 삶은 소중하다.
광장을 떠나기 전 뒤돌아보니 때마침 그림자와 햇살이 정확하게 광장을 반으로 나눈 것만 같다. 더 이상 우리 옆에 없는 그들과 그들이 그리운 우리처럼.


And still, life goes on.
존레논 벽에서 누군가 만들고 간 그래피티.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과 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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