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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May 05. 2021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우리집 뒷 산 얘기를 쓰고싶어졌다.



지난주, 9년 만에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보지 못했던 제주의 아름다움을 삼십 대 초반의 내가 발견해주어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어요. 구불구불한 도로 위를 달리는 우리의 눈 앞에 제주가 새로운 풍경을 툭툭 던지듯 내보일 때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번 감격의 들숨을 쉬고는 했지요. 자연이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라니, 그런데 외국인들이 제주의 땅을 엄청나게 사버렸다지? 자기네 땅이 아니라고 자연은 신경 쓰지도 않고 난개발을 해버리면 어떡하지? 하며 아쉬워했고, 아이고 왜 그렇게 사람들이 제주에 눌러앉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9년 만에 다시 간 제주에서 우리는 겨우 4일을 머물렀어요. 저녁 비행기로 갔다가 아침 비행기로 돌아오는 기가 막힌 스케줄이라 사실상 제주에서 보낸 시간은 만 이틀 하고도 반나절 정도가 되겠네요. 그렇게 육지로 돌아와 남들과 다름없이 제주 앓이를 시작했지요.


카페에서 사진을 정리하던 오후 네 시,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모처럼 일찍 퇴근을 하셨다고, 뒷 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그냥 앉아있기에는 억울한 날씨였거든요. 저는 곧바로 노트북을 덮어 가방에 집어넣고 집으로 갔어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빠와 뒷 산으로 향했죠.


요즘 한국의 오후 네시는 밝은 오렌지빛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순간이에요. 서머타임이 있는 체코에선 이맘때 오후 네시는 가장 자외선 수치가 높은 햇살이 따갑게 온 몸에 내려앉는 한낮이거든요. 등산로의 초입으로 들어서는데 바람을 타고 온 반가운 냄새에 놀라 번뜩 주변을 둘러보니 하얀 포도송이 같은 아카시아 꽃들이 바람에 실려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아, 봄이구나. 아카시아의 계절이구나.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우리 외할머니는 아카시아 꽃내음이 나면 참깨를 심을 때구나, 하고 아신 대요. 농사일이 평생의 일과였던 할머니에겐 아카시아는 새로운 농작물을 파종하는 계절의 신호인 거죠. 제게는 창문을 열고 드라이브를 하고 싶은 계절인데 말이에요.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서 쉴 새 없이 제 콧 속으로 아카시아 향기를 날라다 주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거든요.


아빠가 아카시아 꽃 한 송이를 꺾어 건네주십니다. 갱상도 남자인 아빠가 꽃을 꺾어주는 행위에 요즘 흔히 말하는 '서윗함'이 묻어나지는 않습니다. 왠지 '서울 아빠'들이 말해줄 법한 서윗한 멘트 대신 "자."라는 한마디뿐이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내 멋대로 서윗함을 마구 덧붙여 포장해서 기억하면 그만이니까요.


산을 천천히 오르는데, 바람이 참 좋아요. 막 잎을 틔운 나무 끝 이파리들의 파릇함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참 좋은 바람이 너무나 아름다운 파릇한 잎들을 살랑살랑 흔드는 솨아아 하는 소리는 또 얼마나 감동스럽게요. 이름 모를 꽃들과 낯익은 식물들을 보며 올라가는 길이 쉴 틈 없이 아름다워 나는 제주에서처럼 또 들숨을 헙 하고 들이쉬기를 반복했어요. 제주의 아름다움과 우리 집 뒷산의 아름다움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거죠.(물론 그렇다고 제주에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제주의 바다는 제주에만 있으니까요.)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일상에서 얻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소확행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의 제가 동네 뒷산에서 한아름 안고 내려온 행복은 생각보다 무거워서 소확행이라고 부르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았어요. 비록 우리 동네의 뒷산은 내게 일상 속 배경이지만, 건져 올린 행복은 예의 여행을 떠났을 때 가슴을 부풀게 하던 그런 커다란 행복이었거든요. 낯선 곳을 탐지하느라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 여행자로서의 내가 아니어도 이런 행복을 찾을 수가 있었던 거죠.


설령 이것을 소확행이라 부른다 한들, 이 일상의 작은 행복이 얼마나 찾기 힘든데요. 등잔 밑이 어둡듯 주변에 항상 있어도 그것을 알아볼 마음의 여유와 눈이 없으면 절대 찾을 수 없는 걸 오늘의 내가 찾아냈으니 결코 소소하지 않아요. 그러니 소확행이라는 세 글자 대신 다른 세 글자를 남기기로 했어요.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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