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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May 03. 2021

터키의 햇살을 마시는 법.

[맛있는 터키] #6 생과일주스. 평범하지만 터키여서 특별한 음료.


안녕, EJ. 우리는 프라하에서 처음 만났고, 이듬해 당신은 네덜란드로 나를 초대했어요.

네덜란드에 사는 당신은 그동안 로컬들과 미디어를 통해 중동과 터키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적잖이 들어왔던 터라 나의 터키 사랑을 적잖이 신기해했지요. 우리가 로테르담으로 나들이를 갔다가 덴하그에 있는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던 길, 노란 패키지가 인상적인 네덜란드 국민 초콜릿 우유인 초코멜(Chocomel)을 사기 위해 잠시 들렀던 슈퍼에서 내가 가게 주인에게 어디 사람이냐며 말을 건네고, 터키 사람이란 걸 알고 나선 마치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왔던 사람처럼 수다를 떠는 것을 보더니 가게를 나선 후 내게 말했어요. 

"언니, 터키에 대한 글을 써보면 어때요? 저는 사실 터키인들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어왔는데, 언니가 터키 이야기를 할 때면 언니는 정말 행복해 보이거든요. 언니가 만난, 언니가 살았던 터키는 어떤 곳일까 알고 싶어 져요."


그렇게 당신의 한마디에 나는 내가 경험한 터키를 써봐야겠다 생각했어요. 나는 터키의 어떤 부분을 가장 자신 있게 쓸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가장 먼저 내가 만난 사람들과 음식 이야기들이 떠올랐지요. 나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곳에서 맛 본 기막힌 음식들로 장소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게 가게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식당들과 하루가 머다 하고 내 위장 속에 들어앉아 이곳저곳을 함께 누비던 음식들에 대한 글을 썼어요. 한국에선 비싼 피스타치오, 터키 동부까지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커피 같은 이국적인 음식들이요. 근데 오늘은 '요리'라고 부를 수도 없고, 터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의 '터키스러움'만큼은 여타 음식보다도 충만한 녀석을 소개해보려고 해요. 바로, 과일주스랍니다.


따사롭다 못해 피부 위 따끔함이 느껴지는 햇살 아래에서 마시는 생과일주스 한 잔이란 여느 날씨 좋은 관광지라면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먹거리 중 하나예요. 제가 이집트에 살 땐 학교와 집 사이에 위치한 생과일 주스 집에서 갈아주는 걸쭉한 구아바 주스와 망고 주스를 입에 달고 살았고, 바르셀로나에선 대형마트에 가면 구비되어 있는 착즙 기계에 오렌지를 굴려 넣어 짜낸 오렌지 주스를 한 통씩 사 오곤 했지요. 신선품이 비싼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게 생과일주스란 과일이 흔한 나라들만 누릴 수 있는 특혜로 여겨졌던 터라 나는 주스 가게를 단 한 번도 그냥 지나가질 못했어요.


스무 살이 된 이후 지금까지 거의 십 년에 가까운 지난 세월 동안 나는 햇살만큼은 모자람이 없었던 나라들에 살아왔어요. 지금 살고 있는 체코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이곳에 살며 나는 처음으로 햇살에 대한 갈구함을 느꼈고, 햇살을 한껏 쬐고 돌아오면 얼굴에 하나 둘 올라오던 주근깨조차 태양의 뽀뽀 자국(Sun kissed)이라며 좋아하게 되었어요. 무엇이든 그것이 부재한 뒤에야 그 자리를 더 크게 깨닫는 법인가 봐요.


그러니 터키에 갈 때마다 최소 1일 1잔을 준수하는 갓 짜낸 주스는 나에게 터키의 햇살을 가득 마시는 것과 다름없는 의식이 되어버렸지요. 아저씨가 한 컵 가득 건네주는 주스를 마실 때면 이 생과일주스야말로 터키라는 나라를 고스란히 담아낸 식음료가 아닐까 생각해요. 전반적인 터키 사람들이 지닌 정직함과, 넉넉한 인심, 세 개의 바다로 둘러 쌓인 천혜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보여주거든요.


오렌지 주스 한 컵에 오렌지가 몇 개나 들어가는지 아나요? 오렌지가 제철일 땐 과즙이 풍부해 두세 개로도 가능하지만 오렌지 철이 지나고 나면 쪼글쪼글해진 오렌지를 열개쯤은 짜내야만 한 컵이 나와요. 제철의 주스가 새콤달콤하다면 철 지난 오렌지로 짠 주스는 한라봉이나 감귤처럼 단맛이 더 두드러지고요. 각각의 맛이 전부 훌륭하기 때문에 무엇이 낫다고는 말하지 않을게요. 아참, 석류도 마찬가지예요.


무엇이든 하나만 고르는 것을 어려워하고, 신 맛을 좋아하는 저는 언제나 터키에 머물 때면 이렇게 주문해요. "석류와 오렌지 반반으로 주세요."

석류 주스만 마시기엔 너무 시고, 오렌지만 마시기엔 아쉬워서 항상 주문하는 메뉴예요. 오렌지의 달콤함이 처음에 와 닿고 나면 석류의 상큼하다 못해 혀가 움찔거리는 그 산미가 기분 좋은 끝 맛을 선사하거든요. 터키에 간다면 꼭, 마셔보길 추천해요. 한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석류는 워낙 비싼 데다 여성에게 좋은 식품이니 우리,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다만 주스 가게를 고르는 팁을 주자면, 너무 관광지 한 복판에 있는 가게는 피하는 것이 좋아요. 그랜드 바자르 안에 있는 가게보단 그랜드 바자르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가게가 나아요. 거기다 그 가게를 이용하는 현지인이 많다면 그만큼 맛과 가격은 보증되었다는 뜻이고, 혹여나 순진한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던 주인이었다 하더라도 원래 가격과 다른 가격을 말하는 순간 주변에 있던 터키 사람들의 비난과 뭇매를 피할 수 없을 테니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식당보다는 노점상을 찾는 게 좋아요. 주문을 하면 내 눈 앞에서 현란한 팔 동작으로 착즙 해낸 주스를 주는 노점상과 달리 식당에서는 물 따위를 첨가하거나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부과할 수 있거든요. 이스탄불에서 제가 자주 가는 곳은 시르케지 역 근처에 있는 케밥을 파는 아저씨네와 카라쿄이 역 아래 지하도에 있는 주스 가게예요. 지난 6년 간 이스탄불에 가면 빠짐없이 들르는 곳인데 단 한 번도 그 맛과 양이 변한 적이 없거든요. 두 가게와 가까운 갈라타 다리는 석양을 바라보기에 아주 아름다운 곳이니 주스 한 잔을 들고 다리 위를 걸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왠지 이 석양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오렌지 주스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제 추천이 너무 직관적인가요?
당신이 이 거리를 걷는 날, 주스는 내가 사겠어요. 스마트 폰 하나면 10초만에 이체도 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고작 주스라니, 한 나라의 음식 이야기로 쓰기엔 너무나 심심한 소재인 것 같아 어떻게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내게 이 글을 쓰게 만든 당신에게 부치는 편지라고 생각하고 한 자 한 자 쓰다 보니 이렇게 편지지의 끝자락에 다다랐네요. 내 편지조차도 너무 가이드스러운 건 아닌지 염려스럽지만, 어쩌겠어요. 직업병은 숨길 수가 없네요.


언젠가 당신이 이스탄불에 가는 날, 주스 한 잔 값과 이 편지를 함께 넣어 부치면 좋겠어요. 그럼 오늘은 이만, 곧 또 다른 맛있는 터키의 이야기를 부치도록 할게요. 당신의 5월의 시작이 터키의 주스 같은 싱그러움으로 가득하길!


-2021년 봄바람 부는 저녁에, 슬.

이집트에서 하루가 머다하고 들르던 가게의 망고주스. 걸쭉한 식감에 한 잔만 마셔도 배가 부르곤 했어요.
스페인에서는 이렇게 페트병에 담은 주스를 마트에서 판매해요. 그조차 유럽스러워 보이는 건 제 기분탓일까요. 그런데 정작 이 사진은 당황스럽게도 터키에서 찍은 거예요.
시르케지 역 근처, 트램길 바로 옆에 위치한 케밥 가게. 이곳의 숨은 베스트셀러가 바로 이 오렌지/석류 반반 주스란 말입니다.
카라쿄이 트램역 지하도에 있는 아저씨네 가게. 찾기가 아주 쉽습니다만, 필요하시다면 주소를 첨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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