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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Mar 30. 2016

Be happy, stranger

나의 행복을 빌어준 낯선 이들에게

photographed @Avenue of Stars, Hongkong



1.

기억 속에 각인된 풍경이 있다. 벌써 6,7년은 지난 일이다. 가을날이었던 것 같고, 낮이었고, 나는 어느 낯선 도시(대구였나?)를 걷고 있었고, 동행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길에서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포옹을 해 주는 이른바 '프리허그' 가 한창 유행할 때였는데, 그 날 길거리에 중3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Free Hugs' 플랜카드를 들고 서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내가 먼저 머뭇머뭇 키득키득 다가갔던 것 같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통하고 흰 얼굴을 가진, 짧은 머리의, 하얀 니트를 입은 중학생이 순한 표정으로 팔을 뻗어 '공짜 포옹'를 나눠주었다. 낯선 이들에게 딱 적당한, 너무 가깝지 않게 따뜻한 포옹이었다. 그 짧은 순간, 소년이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행복하세요.


요즘도 가끔 그때가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그 하얀 니트와 행복하세요, 하는 목소리가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가슴속이 따뜻한 물로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낯선 이가 빌어주는 행복이 그토록 사람을 오래도록 감동케 한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길거리에 나온 거였을까. 그때보다 좀 더 나이를 먹은 누나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그 위안의 무게를, 지금쯤이면 어른이 되었을 그는, 알고 있을까.




2.

한 서너 달 전쯤, 좌석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 안은 나른한 햇살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길가 카페에서 딸기바나나 주스 한 잔을 사서 버스에 탔는데, 무심코 좌석 앞의 동그란 컵홀더에 '딸바'를 꽂아놓았다가 사달이 났다.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플라스틱 컵이 튕겨나오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마침 가방엔 휴지가 없었다. 앞좌석 등받이와 바닥이 폭죽이 터진 듯 연분홍빛으로 흥건해졌다. 달고 비릿한 냄새가 버스에 확 퍼졌다. 헐.


당황한(멍청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저만치 앉아있던 승객 중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외국인-말하자면 '외국인 근로자' 하면 흔히 떠올릴 만한- 청년이 내민 손에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손수건에 그려진 복잡한 문양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이 사람은 평소에 이걸로 손도 닦고 얼굴도 훔치고 할 텐데.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눈 딱 감고 쏟아진 잔해들을 대충 닦은 다음, 역시나 눈을 질끈 감고 감사하다고 연거푸 인사하며, 더러워진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손수건을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청년이 큰 눈으로 씨익 웃었다.


그는 돌아가서 손수건을 깨끗이 빨았을까. 얼룩이 다 지워지지 않아서 새 손수건을 사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에게 소중한 물건은 아니었을까, 이국적인 향이 났었는데. 그날 곤경에 빠진 나를 구해준 이방인 청년의 손수건은 우연히도 햇살처럼 샛노란 색이었다.




3.

지난 주말, 서로의 20대를 열심히 추억으로 채워준, 그러나 지금은 바쁘고 멀어서 예전처럼 자주 볼 수 없는, 그래서 항상 조금쯤 그리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뭔가 재미난 일(예를들면 크리스마스에 템플스테이를 한다거나 3.1절에 유관순처럼 옷을 입는다거나)을 벌이기 좋아했던 우리는 이번엔 한복을 입고 경복궁에 가기로 했다. 찰칵찰칵 쉴새없이 사진을 찍고, 서로의 자태에 "한국관광공사 모델이세요?" 과장해서 감탄하며, 깔깔거리면서 초봄의 경복궁을 휘적휘적 걸어다녔다.


그때 혼자 출사를 온 듯한 청년이 말을 걸었다. 인물사진을 좋아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약간의 경계심과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이 겹쳐 어버버 하는 우리에게 그는 포즈를 주문하기 시작했고, 그 열정적인 디렉팅에 끌려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했더니 어느새 나는 문간에 기대 눈을 지그시 감고 지아비를 기다리는 규수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뭐 유명한 사람들인가 하고 잠깐 구경하던 행인들이 우리 얼굴을 보고는 '아니구나' 하는 표정으로(...) 지나갔다. 그는 사진을 보내주겠다며 우리의 메일 주소를 받아갔고, 함께 셀카를 찍고는 사라졌다. 당연히 우리는 탈진하기 직전까지 웃었고, 이미 무척 즐거웠으니 사진을 받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언제 카메라 앞에서 경복궁을 떠돌아다니는 조선 여인의 혼령 같은 포즈를 취한단 말인가.


그리고 며칠 뒤 정말로 사진을 받았다. '다정한 모습 예뻐보여서 용기 내서 요청해 봤다,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짤막한 메일과 함께. 그러고 보니 친구와 보낸 9년간의 시간동안, 그렇게 성의껏 우리 둘을 찍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장을 보냈다. 사진이 정말 좋네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진가가 되시길 바래요. 또다시 답장이 왔다. 실력을 더 키워서 다음에는 더 예쁘게 찍어드릴 수 있다면 좋겠네요. 사진은 시간을 가둔다고 하지요. 두 분 예쁜 우정 잘 간직하시기 바래요.


아마도 그가 우리를 '더 예쁘게 찍어줄' 기회는 아쉽지만 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의 기억은 우리의 20대를 수놓은 수많은 추억들 중 하나가 되어 반짝반짝 빛이 나겠지. 나이 앞자리 수가 바뀌고, 유부녀가 되고, 품 안의 아이를 어르면서 혹은 이번 달 공과금을 계산하다가 문득 그 날의 사진들을 떠올리겠지. 야 너 그때 기억나? 그때 우리 찍어주신 사진사 분은 잘 계실까? 그때마다 우리는 스무 살 새내기와 다를 바 없이 웃음을 터뜨리겠지.





4.

뉴스를 틀면 끊임없이 끔찍한 소식들이 들려온다. 유독 요즘 더 심한 것 같다. 인간이 저렇게 저럴 수 있지, 중얼거리다 보면 이쯤에서 '인간다움'의 정의를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까지 든다.


그러나 내가 삶의 곳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기꺼이 처음 본 나에게 선의를 나눠주었다. 그 사심 없는, 어쩌면 그들에겐 한 방울의 물이었을지라도 나에겐 바다와 같았던 마음들 덕에, 나는 아직 세상을 긍정하고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보여준 찰나의 우정 때문에, 나는 아직 '인간다움'이 좋은 뜻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길 바란다. 기꺼이 낯선 이를 축복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내 안에서 선의를 발견하였으면 한다. 우리 모두 그렇게 길가다 돈을 줍듯, 서로에게 종종 예상치 못한 행운이 되었으면 한다.


고맙습니다, 낯선 사람.




- 2016. 3. 29. 11:5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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