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어걸린 드라마] 넷플릭스 '돌풍'
(스포일러가 살짝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작이란다. 혹했다.
몰아보기를 좋아한다. 완결로 출시됐단다.
출연진 쩌는데? 작가도 박경수란다.
안 볼 이유가 없었다. 2024년 7월 1일, 마음에 휘몰아칠 돌풍을 기대하고 앉았다. 다 보고 나서 크게 흥행 못할 것이라 생각은 들었다. 한쪽 편을 들면 다른 쪽은 보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 깠다. 물론 한쪽은 아예 자기반성의 기회조차 몰수된, 애초에 더 썩은 것으로 묘사됐지만, 기본적으로 정치 혐오에 기반한 질문이다.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초인은 있는가.
애초에 드라마다. 정치적 성향을 차치하고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훌륭한 연출, 배우들이 몰입감 있는 연기만으로도 즐길 이유는 충분하다.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자리에 앉았고, 중간중간 밥 먹고 화장실 간 시간을 제외하고 스트레이트로 달렸다. 설정은 과감했고, 대사는 괜찮았다. 그런데 12회까지 보고 나니 뭔가 전혀 개운치 않았다. 이렇게 충격적인 이야기가 왜 수압 약한 샤워기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 답을 찾았다. 정답은 세상이 너무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전에 폰을 바꿨습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회였나, 마지막 전회였나. 정수진(김희애 분)의 충복 이만길(강상원 분)은 대충 전화로 이렇게 외쳤다.(기억에 의존했으므로 정확하지 않다) 정수진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후 큰일이 터지고, 마침내 정수진의 무언가가 또 터진다.(최대한 스포를 방지하기 위해 이런 쌈마이스런 묘사를 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돌아가보자. 전화가 오면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시작된다. 그리고 무언가가 전달되거나 드러난다. 무언가를 알아냈습니다, 드러났습니다, 다들 긴박감 넘치는 한껏 진중한 목소리다. 곳곳에는 도청기가 자리 잡고 있다. 감옥은 부패한 재벌 일가의 소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들은 접견실에서 스테이크를 썰면서 태블릿 화면으로 화상통화로 세상과 쉽게 연결된다.
통화녹음, 도청기, CCTV, 몰카. 드라마 안에서 사람은 더 이상 사건을 만들기 위해, 혹은 해결하기 위해 뛰지 않는다. 그들은 확인하고 전달하고, 거기에 관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눈 다음 다시 스마트폰으로 정적에게 전화를 걸어 협박한다. 그리고 그 또한 고스란히 녹음되고 있다.
기록된 증거는 더 이상 어떤 추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건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보다 길목에 녹음기를 하나 던져두는 게 효과적이다. 드라마 속 사람들은 이제 움직이지 않고 전화한다. 전화로 부탁하고, 얻어낸다. 그러니 인물들이 기껏 한다는 게 만나서 잔뜩 목에 힘을 주고 대사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 그러니 대사는 장황하고 현학적이다. 있어 보이지만, 대충 쉽게 바꿔서 풀어보면 별 내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그런 부분에서 현실적이지 못하냐, 그건 아닌 거 같다.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는 범인을 찾기 위해 목욕탕에 잠복하고 주변을 탐문한다. 오늘날의 형사는 CCTV를 돌려보고, 폰을 조사하고 포렌식해서 지운 것을 되돌린다. 그렇게 하면 될 것을 뛰어다니며 수사하는 것도 웃긴 일이요, 투머치다. '돌풍'에서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행동 방식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바로 그 점이, 이런 대작의 박진감이 반감된 이유요, 내가 뭔가 찝찝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드라마에서 정적을 물 먹이기 위해 국정원에서 북한의 내밀한 자료를 받아낸 과정은, 그 자료의 중요성에 비해 얻는 과정이 너무도 조악했다. 하긴 뭘 더 긴장감 넘치게 할 수 있겠는가. 전화로 물어보고, 요청하고, 주고받으면 그만인데 북한으로 누가 굳이 넘어가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바야흐로 세상은 대딸깍시대다. 은행 업무도, 열차나 비행기 예매도 모두 한 자리에서 한 손으로 들고 할 수 있게 돼버렸다. 당연히 세태는 문화에 반영된다. 드라마에서는 긴박한 순간이라고, 집중하라고 BGM이라도 알려주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거대한 음모도 점점 재미없게 흘러가는 시대, 나는 무엇으로 재밌게 살아야 할지, 어떤 순간에 세상에 집중해야 할지 좀 막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