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마우스피스>
나는 극을 좋아한다. 무대 위에선 이 세상 어디에선가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사건도, 절대로 일어났을 리가 없는 사건도 전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안의 인물은, 지극히 현실적이거나 지극히 공상적인 그 세계를 각자의 방식대로 마주한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극작품을 좋아하는 나의 소소한 낙이다.
나는 그들이 행복에 가까워질 때면 함께 기뻐하는 든든한 지지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방관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버거운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칠 때조차 안타까워하면서도 지켜만 보는,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잠시 슬퍼하다 이내 잊고 마는 아주 냉정한 제3자.
키이란 헐리는 연극 '마우스피스'를 통해 이와 관련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는 극의 주인공은 과연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했는가?
재능과 예술 자체보다는 상업성을 따지는 관계자들에 질려 일을 그만두었던 중년의 극작가 리비, 그리고 가난한 가정에서 가정폭력을 당하며 불우하게 살아온 데클란.
둘의 관계가 친밀해지면서 데클란은 자신의 이야기를 리비에게 털어놓게 되고, 리비는 데클란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이 극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그 시나리오의 결말에 얽혀있다.
리비는 시나리오가 데클란의 자살로 매듭지어지길 바란다. 적당한 비극성이 있어야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클란은 이야기 속 자신이 그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현실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죽어봤자, 전혀 극적이지 않을 뿐더라 그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 데클란의 죽음은, 극중 데클란의 죽음보다 미약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극중 데클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지 않은 채 본인이 선택한 가상의 인물에게만 연민을 느끼는, 관객들의 위선적인 실체를 보여주는 행동일 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까? 영감 혹은 소재가 된 주인공의 바람대로? 아니면 그 소재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의도대로?
두 사람의 관점이 충돌하면서 결국 둘은 갈등을 겪고, 극은 비극으로 향한다. 공연을 보다 보면, 사실 두 입장 모두가 이해되어 머리가 아파온다.
이야기의 당사자인 만큼 데클란이 원하는 대로 가야하지 않겠나 싶다가도,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선 관객을 모을 정도의 자극과 상업성이 필요하다는 리비의 말도 맞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과연 리비는 데클란을 위하는 게 맞았을까? 본인의 창작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해두고 그에 적당한 데클란의 이야기를 써먹은 것은 아닐까?
분명 리비의 말은 현실적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만 제 뜻을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자극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리비의 모습은 과거의 그를 창작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관계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보인다.
극중극 <마우스피스>는 리비에 의해 실제 연극으로 올라오게 되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인 데클란은 그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한다. 갈등 이후 리비가 연락을 끊었기 때문이다. 데클란은 연극을 보러 극장으로 달려가지만 수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데클란은 '돈'이 없었고, 따라서 '예술문화'를 향유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클란을 공공미술관에 데려갔던 리비는 분명 "누구나 예술을 향유할 자유가 있다"고 말했지만, 이 세상에는 유료 예술, 즉 돈이 없으면 향유할 수 없는 예술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리비의 <마우스피스>도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극장에 들어간 데클란이 리비를 향해, 관객을 향해 뱉는 말은 날카롭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대학로 한 극장에서 연극 '마우스피스'를 보는 관객이 아니라, 작가 리비의 연극 <마우스피스>를 보는 관객이었다. 리비와 마찬가지로, 나는 위선과 예술의 경계 위에 서 있었다.
이후의 결말은 또다시 두 갈래로 찢어진다. 리비는 그 이후 데클란이 커터칼로 목을 그어 자살한다고 서술한다. 한편 데클란은 다음에 일어날 일이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위선적인 예술가와 관객에게 달려있지 않다고 외친다. 솔즈베리 언덕으로 달려가 그림을 찢어버리면서 말이다.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워지게 하는 작품이다. 대상화를 시키지 말라고 말하는 인물조차도 사실상 대상화된 것이니, 내가 이 작품을 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여기서 의미를 찾으려는 행위조차도 괜찮은 것인지 물음을 던지게 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극의 형식적인 특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 안에서 만들어지는 희곡이 주요 소재이기 때문에, 배우가 극중 인물이 되어 서로 대화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소설을 읽어주듯이 대사를 읊는다.
나아가 리비와 데클란 외의 사람들의 발화가 필요한 장면에서는, 그 내용이 무대 뒷면의 전광판에 띄워진다. "녹음된 대사가 흘러나올까? 아니면 다른 한 사람이 제3자를 연기할까?"라는 나의 의문이 무색하게도, 둘 다 아니었다.
그 누구의 목소리도 없이 리비가 타이핑한 극본의 일부로 내용을 전달하는 이 방식은, 극 자체가 리비가 쓰는 시나리오 속이라는 걸 관객들이 잊지 않게끔 만들어주는 장치로 보였다.
연극 '마우스피스'와 극중극 '마우스피스'의 경계를 허물어가면서까지 관객을 이야기 깊숙이 끌고 들어가는 것은, 결국 한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흥미'를 이유로 보내는 시선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라는 것. 단순히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소재로만 소비되기에는 그 삶의 무게가 훨씬 무겁다는 것.
예술을 사랑하고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감히 말하며, 이 메시지를 보여주는 대사와 함께 글을 끝맺어본다.
"난 네가 궁금해. 네 이야기도.
누구나 자기 이야기가 있잖아."
"아니요, 어떤 사람들한텐
그냥 사는 거, 그것 말곤 없는데요."
/ 연극 '마우스피스' 中
2022. 11. 27.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