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비더슈탄트>
글을 시작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주제이지만, 극에서 이를 전면에 드러내고 활용하는 만큼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다. 뮤지컬 <비더슈탄트>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권력을 잡은 '나치 독일'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극중 독일에서는 이때 교내 모든 스포츠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진다. 어릴 적부터 펜싱 칼을 잡아왔던 매그너스와 아벨이 펜싱을 계속하는 방법은 오로지 '아이드 스포츠 학교'에 입학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드 스포츠 학교는 단순히 운동 엘리트를 위한 학교가 아니었다. 이는 매그너스와 아벨이 하겐, 재스퍼, 프레드릭 등의 친구들과 함께 나중에 알게 되는 '학교에 대한 뜻밖의 진실'이기도 한데, 사실 이곳은 신체 능력이 우수한 청년들을 모아 독일의 군인으로 육성하기 위해 세워진 군사 학교였다.
독일의 힘을 보이자
특별히 선택받은 청년들
우리는 독보적인 독일의 청년
- 넘버 <독일의 청년들> 中
나는 시놉시스를 미리 읽었기에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로 해당 공연을 관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황스러울 만큼 독일 나치즘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극이었다.
입학 시험 장면부터 머리카락 색깔과 피부색, 눈동자색, 심지어 두상까지 지적하며 ‘우월한 인종, 선택받은 인종’만을 걸러내는 당시 독일의 차별적 제도가 고스란히 재연된다. 심지어 ‘총통’이라는 암시적 언급을 넘어서 ‘히틀러’의 이름까지 수차례 언급된다.
가감없이 표현하자면, 다소 거북했다. 제국주의 사상 아래 식민지배를 당했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독일의 제국주의 사상을 이렇게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창작뮤지컬을 올리는 것이 과연 괜찮을까? 설사 보는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도록 하여 당시 독일의 행태를 비판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을지라도 관람객 대다수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조금은 성급하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해당 극은 나치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제국주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보다는 아이들의 성장 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관람 내내 잊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신경썼던 것은, 이 아이들이 독일인 중에서도 이상적인 외모와 신체능력을 가졌다고 판단되어 ‘선별된’ 독일인이라는 점이었다.
잘못이 분명함에도 개인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정당화되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로 남아있는 그러한 일들을 대할 때 우리가 따르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바로 결과적인 사회적 영향력에 집중할 것.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려면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일부러라도 사회적 차원에서 책임을 따져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래서는 안 되었던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뮤지컬 <비더슈탄트>는 그러한 규칙을 깬 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결국 가해자의 입장에 선 아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과정이 참 보기 힘들더라.
매그너스.
나는 모든 걸 타고난 사람보다는,
너같은 사람에게 더 끌린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발전하는 사람.
- 라인하르트 클레어
주제의식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극중 클레어 선생이 매그너스를 유혹하는 방식이 정말 교묘하다. 클레어는 처음 매그너스가 학급에서 5등을 하고 분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승부욕을 알았을 테다.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며 칭찬해주고, 권력과 동일시 되는 높은 등수를 계속해서 부여한다.
무엇보다 특별 수업을 제안하고, 권력을 가져야 지키고 싶은 이들을 지킬 수 있다며 인정욕구만큼이나 친구(아벨)에 대한 애정이 강한 매그너스에게 권력을 좇을 명분을 만들어준다.
인간의 인정욕구가 이렇게나 무섭다. 분명 매그너스는 처음에 받은 낮은 등수에 부끄러움을 느꼈을 테지만, 이내 스스로가 잘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었을 거다. 어느 순간 본인이 누리는 특별 대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채고서도, 본인에게 칭찬과 권력을 부여한 클레어(그리고 그로 대변되는 학교)를 부정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클레어의 계략을 인정하면 만족감을 준 칭찬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됨과 동시에 그의 미끼에 걸려든 어리석은 자신을 인정하는 셈이 되니 당연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승부욕과 향상심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쉽게 그른 것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유대인과 집시들, 동성애와 장애,
정치와 종교, 나치와 다른 생각
재판 없이 곧바로 체포되고
수용소로 보내진다.
- 넘버 <비더슈탄트 2> 中
라이너의 문서를 읽는 아이들의 입에서 이러한 내용이 나왔을 때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 하나가 떴다. 유대인, 집시, 동성애, 장애 등 당시 독일 사회에서 박해 받는 여러 유형의 소수자를 직설적으로 언급한 이상, 각각과 관련된 서사가 극에서 드러나야 할텐데 그게 가능할까? 하지만 이내 아이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풀리면서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가장 먼저 아벨은 사실 유대인이다. 독일 가정에 입양되어 마치 날 때부터 독일인인 것처럼 살아가지만, 당연히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학교에서 클레어 선생이 인종학을 운운하면서 유대인을 비난할 때, 오로지 아벨만이 그에 대해 질문한다.
이후 매그너스가 클레어에게 현혹되어 일부 유대인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탄압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할 때, 그 '유대인'들과 자신이 어느 하나 다를 것 없다며 차별의 부당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프레드릭은 극중 이미 죽음을 맞이한 라이너와 사랑했던 사이로, 말로 명시되지는 않지만 그 둘의 동성애가 꽤나 노골적으로 연출된다. 프레드릭은 끝내 누구에게도 들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차별의 대상이 된다고 인식한 인물이다.
레코드 가게를 하는 부모님을 둔 재스퍼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유대인과 집시 친구들을 둔, 그들을 배척하는 독일 사회와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캐릭터다. 혐오는 당연한 것이 아니며, 당연히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장애인 차별에 관련된 이야기는 극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문제 제기를 해두고 한 가지만을 빼놓은 것이 못내 아쉬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나의 걱정을 없애주는 흥미로운 후기를 발견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고, 극 중에 부상을 얻은 하겐이 장애인이라는 소수자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비더슈탄트(저항)’의 대상이 이런 차별과 혐오였을까? 사실 아이들이 학교를 거부하며 외치는 대사의 논지는 '차별에 맞서자!'보다는 '우리를 속이고 군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학교에 저항하자!'에 가깝다.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들이 거론되었지만, 사실 그들의 아픔을 유형당 캐릭터 하나를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들여다볼 뿐 구조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는 걸 제시하지는 않는다. 극을 보는 입장에서 재미를 느낀 것과는 별개로, 과연 저것이 올바른 방향의 '저항'이었을까 다시 한 번 고민해보게 된다.
그래도 뮤지컬 <비더슈탄트>를 보며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신념이 한 가지 바뀌었다. 지금까지 난 ‘후회’라는 것이 과거의 실수를 자꾸만 현재의 나에게 상기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지나간 기억을 붙들고 있는 건 결국 과거에 그랬던 나 때문에 나를 ‘앞으로도 그럴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틀에 가두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어느 정도 반성을 했으면, 털어내는 게 맞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극중 아벨은, 괴롭힘을 받던 유대인 아이를 구해주지 못하고 스스로 유대인임을 숨겼던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계속 마음 속에 담아둔다. 어린 아벨의 비겁함을 잊지 않고, 되새기고, 학교에 맞서 ‘비더슈탄트’를 외칠 원동력으로 삼는다. 매그너스도 마찬가지로, 아벨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크나큰 후회를 바탕으로 히틀러를 향해 검을 뽑는다.
후회라는 것은 나를 틀에 가두고 변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둘의 이야기를 보면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닌 것도 같다. 오히려 견딜 수 없는 후회는, 한 사람의 가슴에 새겨져 스스로가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강하게 추동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 없이 옳음을 실천하는 사람은 참 존경스럽다. 극중 재스퍼 뮬러가 그런 사람이다. 생각 없이 웃기만 하면서 사는 듯한 감초 캐릭터지만, 사실 정말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벨도, 매그너스도 후회로 인해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지만(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재스퍼에겐 후회가 없다. 본인이 겪은 유대인 친구들, 집시 친구들을 바탕으로 그들도 자신과 다를 거 하나 없는 사람들임을 알고 행동하는 것뿐이다.
자책도, 후회도 없는 선의라는 건 정말 소중하다. 세상을 미움 없이, 편견 없이 살아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재스퍼가 펜싱을 하는 이유에서도 이런 면모가 드러난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지키기 위해, 라는 영향력 행사의 목적으로 펜싱을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사람임을 느낄 수 있어서” 펜싱을 좋아한다.
하지만 혐오에 힘을 쏟지 않을 뿐, 지킬 것을 지키기 위한 적당한 분노와 ‘비더슈탄트’를 외칠 만큼 굳건한 정의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다. 어찌 보면 이 극에서 등장하는 사람 중에 재스퍼가 가장 용감하고 강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
보는 재미와 듣는 재미 모두를 잡은 극이라는 점에서 좋은 창작극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특징적인 성격과 함께 촘촘하게 드러난 덕분에 인터미션 없이 1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전혀 지루할 새가 없었다. 웅장한 넘버와 역동적인 안무는 보는 재미와 듣는 재미 모두를 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주제 의식에 대한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물론 모든 극이 선한 메시지를 그려낼 필요는 없다. 어긋난 시각이 담긴 작품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반쯤은 관객의 몫인 것도 맞다. 그러나 남은 반은 분명히 창작진의 몫이다.
관극 후 사람들이 어떤 감상과 논리를 가지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극의 흐름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한 역사적 사건을 작품으로 묘사할 때, 그 창작진은 더욱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2022. 12. 11.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