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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ug 16. 2024

나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뮤지컬 <명동로망스>

누군가가 내게 살면서 가장 좋았던 관극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놀랍게도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공연을 보고 나면 매번 "한 번 더 보고 싶다!"를 외치던 내가, 처음으로 정반대의 생각을 한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공연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그날의 여운과 향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 오히려 재관람을 마다했더랬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삶을 사랑하게, 가슴 뛰게 만들었던 그 작품의 이름은 <명동로망스>. 오늘은 2년 전 여름에 다녀온 1965년의 명동을 떠올리며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모든 건 순간이야, 조금만 참으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에는 행복도, 슬픔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기 마련이기에 너무 자만하지도, 너무 낙심하지도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마 당신에게도 낯설지 않은 문구일 것이다. 누군가가 힘들지만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곧 지나갈 거야. 조금만 참자."라며 위로를 건네지 않는가.


뮤지컬 <명동로망스>의 주인공 선호 역시 그 말을 수십 번씩 되뇌며 살아온 사람이다. 명동 주민센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그는 언제나 점심시간, 퇴근시간, 주말만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살아간다.


윽박지르는 주민을 마주해도 웃으며 대답하고, 막무가내로 당직을 시키는 상사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을 떠맡는다. 즐겁지는 않아도 그것이 앞으로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조금만 참으면 지나갈 테니, 꾹 참고 일을 하는 선호는 우정도 사랑도 당장은 불필요하다며 다음으로 미뤄버린다. 


다음 다음 다음 다음을 위해서
다들 다들 다들 그렇게 사는 것
모든 건 순간이야 조금만 참으면 돼

날 살게 하는 한 마디
이 또한 지나가리라

M1. 이 또한 지나가리라 中 / 장선호, 전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선호와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극에서 빠져나와 현실 속의 우리를 돌아보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학창 시절의 우리에게 세상은 그런 건 나중에 고민하라고, 일단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서 생각해 보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대학에 가면, 취업할 때 쓸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마냥 놀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외국어를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고, 대외활동을 하고, 취업 스터디를 한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 과정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일단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니까 열심히 하는 거다. 그래야 '나중'의 우리가 편해질 테니까.


우리의 모습과 똑닮은 선호를 보니, 분명 하라는 대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이 든다. 앞만 보고 달렸는데, 왠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당장은 때가 아니라며 스스로에 대한 고민도, 주변 사람들과의 추억도 모두 미뤄두었는데, 정말 이렇게 모든 걸 ‘다음’으로 미루고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난 뭐가 그리울까, 그리워할 건 있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1956년 명동의 로망스 다방으로 오게 된 선호는 다방으로 모여든 당대의 여러 예술가를 만나게 된다.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하는 시인 박인환,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그림을 포기하고 일을 하기로 결심하지만 끝내 붓을 놓지 못하는 자신에 좌절하는 화가 이중섭, 그리고 타오를 듯한 자신의 마음을 담아 글을 쓰고 싶어하던 작가 전혜린.


화공의 꿈도 가장의 행복도
붙잡지 못한 나의 자화상

이게 다 나야 이 그림들
현실 앞에 제물로 바쳐진 내 모습
두고 떠나면 또 다른 그리움이 될
내 그림 내 상처 내 족쇄 내 꿈

M9. 자화상 中 / 이중섭


그러나 그들의 예술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다. 자신이 예술이라고 추구하는 것들이 과연 정말 예술인지, 누군가가 혹평하듯 정말로 자신의 작품이 사실 텅 비어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때로는 현실적인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픈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지 못하는 그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중섭은 끝내 그림을 포기하지 못한다. 일본에 있는 가족이 곁에 없어 너무나 그리운 만큼, 그림을 놓으면 그만큼 그림을 그리워하게 될 자신을 알아서다. 어느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그는 책망하고 비난한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중섭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나는 연민 대신 부러움을 느꼈다. 저렇게 고통스러워할 만큼 열망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받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렇게 무언가를 바라본 적이 있을까 싶어 조금은 착잡해졌다.


그리고 이런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난 뭐가 그리울까 그리워할 건 있나
난 무얼 그렸었나 거기 남겨진 내 자화상
날 미치게 하는 날 숨쉬게 하는
나의 그리움은 무얼까

M10. 돌아가면 中 / 장선호


무너져가는 중섭을 본 선호는 드디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현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자신은 과연 무엇이 그리워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는지 묻는다. 


아냐 아냐 아냐
어서 지나가길 기다려 이 감정
혼란도 순간이야 이대로 보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M10. 돌아가면 中 / 장선호


하지만 이내 선호는 생각을 멈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러한 혼란도 결국은 지나갈 것이라며 또 한 번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외친다. 정말로 자기가 살던 2021년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할 시간조차 없을 것이니 말이다.



나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붙잡지 않으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선호가 2021년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딱히 그리운 것도 없고, 반드시 하고 싶은 일도 없지만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선호는 자신을 과거로 데려온 벽장을 들락날락하며 현재로 돌아가려 노력한다.


"다음이라는 시간이 존재하기는 해요?
다음이라는 시간이 당연히 당신에게 올 거라고 확신한다면 그건 오만이죠."

/ 전혜린


해야 하는 일을 가장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하다는 선호에게 혜린은 단호하게 말한다. 해야 하는 게 어디 있냐며, 사람은 하고 싶은 걸 가장 열심히 해야 한다고. 또 언제 전쟁이 터져서 '다음'이 사라질지 모르니, 심장이 뛸 수 있을 때 마음껏, 원하는 대로 뛸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렇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다음을 장담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내일 정도는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일주일 정도까지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1년 후는 어떨까? 5년 후, 10년 후, 20년 후는? 우리는 어쩌면 다음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서, 나에게 더 좋은 미래를 주겠다는 말을 핑계로 현재를 무심코 흘려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지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
내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어
나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붙잡지 않으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M17. 명동로망스 中 / 장선호


이 또한 지나가리라. 모든 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흘려보낼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붙잡아야만 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1956년의 명동에서 이를 깨달은 선호는 이제 지금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현재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극은 막을 내린다. 선호가 어떤 지금을 살아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꿈을 찾았을 수도 있고, 여전히 성실한 공무원으로 매일을 살아갈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전처럼 애써 웃으며 민원을 응대하고, 어쩌면 또 상사의 이런저런 일들을 도맡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내렸든 이전과는 분명 다른 삶일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감았던 눈을 뜨고, 막았던 귀를 열고, 마음껏 숨 쉬며 살아가기로 다짐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뮤지컬 <명동로망스>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선호들에게 외친다.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고, 다음이 아닌 지금을 살아보자고, 그렇게 나의 삶을 사랑하자고.



2023. 04. 1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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