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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 음악이 만드는 하나의 인생

도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by 유정

해금은 현을 활로 문질러 연주하는 한국의 전통 현악기라고 한다. 지판이 없어 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잡아 음정을 조절하는 이 악기는 바깥줄과 안줄, 딱 두 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금 연주가 김보미의 삶도 말 그대로 해금 연주와 같았다. 동떨어진 두 개의 세계를 오가며 음악 인생을 이어 왔다. 아니, 동떨어진 건 맞을까? 두 줄 모두 결국 '해금'의 일부인 것처럼, '음악'이라는 커다란 예술 갈래 안에서 그는 그저 꾸준히 걸어왔을 뿐이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은 김보미의 삶을 짧지만 구석구석 들여다볼 수 있는 에세이다. 음악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해금과 친해지는 과정을 담은 1부, 학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와 전통음악과 포스트록을 오가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해 온 음악인으로서의 삶과 에피소드를 다루는 2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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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한 그 세계


참을 수 없을 만큼 그 세계가 궁금했다. 왜 소리를 저렇게 내는 걸까? 왜 이상하게 소리를 내는데도 시끄럽지 않은 걸까? 소리가 구불구불 질척거리는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p.14 | 음이 쌓이다


1부는 켜켜이 쌓여가던 화음과 음악에 관심이 많던 소녀가 판소리에 매료되고, 국립국악중학교에 진학하며 음악을 체계적으로 습득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으레 예술은 오로지 천부적인 재능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들 말한다. 저자는 자신을 뛰어난 기술과 재능의 소유자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빠른 연주가 어려워 끊임없이 연습하고, 공연을 앞둔 상황에서는 완벽해질 때까지 공연 곡의 연습을 거듭한다. 즉흥연주를 앞둔 날에는 어떤 곡에든 대응하겠다는 마음으로 다양한 연주를 준비한다.


"내가 잘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더니 시간이 쌓이기 시작했고 그것이 실력이 되더라. 내가 직접 겪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돈을 주고도 바꿀 수 없어.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봐. 살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찾아 올 거야. 그래도 지켜내봐. 끝까지 절대 포기하지 마." (김영재 명인 曰)

p.39 | 큰 나무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온 그는 가장 중요한 점을 '꾸준함'이라고 말한다. 해금을 선택하게 된 우연적인 계기, 어느 순간 국악이 어려워 가장 기본으로 돌아간 이야기, 존경하는 스승님들에 관한 이야기 등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나열되지만, 이들은 모두 그가 '꾸준히 연주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라는 하나의 큰 틀 안에서 전개된다.


내가 산조를 좋아하고 연습하는 이유는 전통의 보존과 계승이라는 거창한 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닌, 그저 아름답고 좋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아름답기에 가까이 두고 싶고 나를 시험하는 그 아름다움에 기꺼이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었다.

p.53 | 페르소나 실험: 전통과 창작의 경계에서


어쩜 이렇게까지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던 나는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좋아서 하는 사람 앞에는 장사 없다더니, 딱 그대로였다. 산조의 매력에 푹 빠진 김보미의 글에서 그가 얼마나 해금을, 국악을, 우리 선율을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은 하지 말자'로 시작된 도전


그가 해온 음악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니, 한때 시대음악에 큰 균열을 냈던 아방가르드 음악과 닮아있었다. 이 장에서는 특히 잠비나이의 결성 과정부터 작곡, 레코딩 과정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읽다보면 음악이 궁금해 안 들어볼 수가 없었다. 잠비나이의 음악을 모두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랜덤재생을 눌러 틀어놓은 채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소한 분위기의 첫 멜로디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전위음악! 하나의 정해진 틀을 깨부수고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잠비나이의 음악관 역시 아방가르드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


음악하기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태생이 다르고 그 행위의 정서나 테크닉 모두가 서양의 것과는 완벽히 다른 이 극동아시아의 악기들을, 현재 보편화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양음악을 그저 흉내 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본다. 이를테면, 국악기로 영미권의 팝 음악을 연주한다든가 서양 음계로 만들어진 선율의 불편한 연주를 이어가는 것들 말이다.

p.138 | 거칠게 긁고 때리고 깨지는 듯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모든 것을 깨부순다기보다는, 하나의 해결사로서 움직이는 잠비나이의 음악이다. 해결이란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찾아내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국악기로 현대에 유행하는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문제다. 국악기 고유의 소리가 가지는 질감이, 서양 음악과는 어우러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상황은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소리의 질감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내면 된다. 현대에 새로운 유행을 불러올 수 있는 아예 새로운 음악을, 국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에 맞추어 '제대로' 만들어내면 된다. 그 과정에서, 김보미 연주가는 국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 역시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했다. 기존에는 잘못된 것이라 평가받았던 국악기의 다양한 소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감성적 끌림으로 행해진 밴드 잠비나이의 본능적인 음악은 전략적으로 봐도 상당히 파격적이며 혁신적인 도전이었다.


그들의 음악의 여정을 낱낱이 파헤치는 동시에 공연 과정에서 겪은 새로운 공간과 경험,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내는 2장은 그야말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남의 삶을 읽는다는 것


한평생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읽고 보고 들으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남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는 저자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인생을 읽으면서 나도 내 인생을 훑어보게 되었다고. 나는 음악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린 음악이 있고, 내 삶을 바꾼 음악이 있고, 나를 더 살게 한 음악이 있다는 것. 서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우리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음악인이 아니기에 알 수 없었던 백스테이지에서의 두근거림, 투어의 체력적인 힘듦 등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또다시 그 여정 사이에 목격하는 사회적인 문제 - 예술을 즐기는 유럽인들의 여유, 환경을 생각하는 움직임 등 - 로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사람의 인생과 삶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에세이는 계속해서 두 가지의 대비를 반복하며 전개된다. 하나는 전통음악, 하나는 전위음악. 하나는 사람, 하나는 음악. 하나는 한국, 하나는 해외. 그 안에서 얽히며 만들어진 김보미라는 연주가는 수많은 두 줄 사이에서의 궤적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마치 해금의 바깥줄과 안줄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결국 하나의 선율을 완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단 한 권의 에세이에도 이렇게 많은 인사이트를 곱씹어볼 수 있다는 것은, 저자가 삶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 임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쌓아온 덕분일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걸어온 그의 발걸음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려온다. 우리와 비슷한 듯 다르고, 익숙한 듯 새로운 그의 이야기는 그 특징마저도 그의 음악과 닮아있었다.

컬쳐리스트 장유정 명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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