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가장 많이 그리는 그림은 본인을 공주라고 상상해서 그리는 그림이고 현실감이 떨어진 엄마 그림도 많이 그린다. 그래서 본인과 엄마를 구분하기 힘든 그림일 때가 많다.
미래의 공주가 된 본인 모습을 그리기도 하면서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는지 묻기도 한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딱히 할 말이 없다. 무언가 되고 싶었던 적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집안이 잘 사는 것도 아니지만 가난하게 느낄 만큼 힘든 건 아니었다. 졸업 때까지 용돈벌이 없이도 무난히 잘 다녔다. 귀가시간을 정해놓은 아버지가 무서워 어떻게든 그 시간을 지키려고 애썼다. 참 재미없고 무난하게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숨통이 막혔던 던 건 맞는데 부모님에게 반항한 다는 것이 두려워 객기 한번 못 부렸던 것 같다. 게으르고 귀차니즘 성격이라 연애도 오래 했다. 순서가 정해진 것처럼 결혼이라는 절차를 따랐다. 결혼한 지 일 년 반쯤 지나 큰 아이가 생겼고 본격적인 전업주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아이가 생기면서 무난하게 살아온 잔잔함에 무수히 많은 돌들이 던져졌다. 불만을 울음으로 표현하는 아기는 허구한 날 울어댔다. 밥을 먹이고 설거지를 할 때도 기어 와서 다리를 붙들고 울고 화장실 볼일을 볼 때도 울어댔다. 문을 열면 나을까 싶어서 열고 볼일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낮잠도 안 잤다. 밖에 돌아다니면 힘들거라 좀 자겠지 했지만 자기 발로 걸어 다니지 않았다. 아기띠나 유모차도 무용지물이었고 무조건 안으라 했다. 그렇게 10kg이 넘는 아기를 한 손으로 안고 동네를 돌고 나면 내가 먼저 지쳐 쓰러졌다.
놀이터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미끄럼틀을 탈 때도 그네를 탈 때도 바닥에 주저앉아 모래놀이를 할 때도 옆에 앉아있지 않으면 많이 울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거부가 심해 학교 들어가기 바로 전 1년만 보냈다.
시아버님 암투병이 한창일 때 큰아이 사춘기가 왔다. 자기만 바라보아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권도 학원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휴대폰을 몰래 변기에 빠뜨렸다. 휴대폰 주인인 아이의 엄마는 큰 아이를 일진으로 몰고 갔다. 사과를 해도 성의가 없다 했다. 울화가 치밀었다. 얼마 후에 편의점에서 물건도 훔쳤다. 편의점 cctv로 확인하니 사람들이 있나 없나 눈치를 보는 게 아니었다. 계산대 앞의 물건을 그냥 제 물건인 듯 주머니에 넣었다. 반 친구 물건들도 훔쳐서 큰아이와 친한 아이 하나가 나에게 편지를 써주었다. 시댁에 있었던 시절이었는데 어머닌 매일 눈물을 훔치는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오래전이지만 나의 치부를 동서한테 가서 그대로 흉보는 어머니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라 하고 속으로만 삭혔다.
어느 날 어금니가 흔들렸다. 이가 흔들렸지만 그때는 남편에게조차 말을 못 했다. 이가 아팠던 것도 아니었고 충치가 있던 이도 아니었다. 멀쩡했던 어금니가 갑자기 흔들렸다. 병원에서도 이상하다 하고 스트레스받은 일이 있느냐 물었다. 흔들릴 당시에는 원인을 모르다가 치과의사 선생님의 물음에 무릎을 쳤다. 스트레스가 온몸으로 온 것을 말이다. 당시 아버님 암 치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내막은 모르지만 큰 아이가 사춘기가 온 것은 눈으로도 보이니까 다 그러면서 크는 것처럼 치부되었고 내 흔들리는 이도 뽑아버리면 마무리되는 일이었다. 아버님 일 이외의 다른 일에 대해서 이야기가 거론되는 건 그냥 하찮은 일이 되고 말았다. 네가 너무 신경을 써서 그리 되었구나가 아니라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이도 있는데 그깟 일들은 그냥 그런 일쯤으로 치부되었던 것 같다.
아버님은 골수까지 이식받는 큰 수술을 받으셨지만 퇴원을 며칠 앞두고 임종을 맞으셨다. 수술을 잘 진행되었고 퇴원까지 얘기가 오갔었던 때였는데 합병증이 갑자기 덮쳤다. 결국 이기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돌아가셨다는 말이 딱 맞게끔 세상을 떠나셨다.
그 당시 시댁살이를 했지만 시아버님 돌아가시기 전 1년 전쯤 분가를 했다. 분가하는 과정에서도 내쫓기다시피 나오게 되었다. 생각이야 오랫동안 하셨겠지만 당장 빠른 시일 안에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말씀만 하셨다. 말씀만이라도 힘들겠지만 이만저만해서 그러니 따로 나 가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면 내가 더 죄송했을 듯하다. 말씀은 아버님께서 하셨지만 어머니 생각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일주일 만에 집을 얻어 분가했다.
결혼하고 나서 분가 전까지 난 참 좋은 며느리였다. 친정 부모님보다 시부모님의 사소한 것까지 살뜰히 챙겼다. 친정 부모님이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입한 것도 있었다. 시부모님은 아들일이라면 만사일 제쳐두시는 분들이라 그분들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이 꼭 해서는 안될 일 같았다. 새댁 때는 멋모르는 며느리라 그랬고 새댁 딱지를 떼고 나서도 시어머니께서 내 속이 만신창이가 될 만큼 닳아 없어지게 했어도 참아야만 했다. 너무 억울해 시할머니를 붙들고 대성통곡한 적도 있다. 속사정을 아시는 할머니는 아가야 네가 참아야지 어떡하겠니라는 말씀으로 위로하셨다. 친정 엄마께 속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안 그래도 시집살이 힘들다고 걱정하시는데 마음이 편치 않으실 듯해서 번번이 안부 인사만 드렸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닌 우리 집에서 한 달간 머문 적이 있다. 머무시는 동안 우리 집에서 3~4일 정도 머물고, 일을 했던 동서가 쉬는 날에 맞춰서 하루 이틀 동서네 집으로 왔다 갔다 하셨다.
그 당시 서울역 근처 재계발 주택이었던 동서네 집 실 거주 평수가 10평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집이었다. 일을 하고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컷을 텐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우울증을 앓으신 어머니는 그런 눈치를 못 채셨나 보다. 동서는 좋은 며느리처럼 행동하다 결국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만 머물게 되셨다. 어머니 얘기를 잘 받아주는 동서가 없으니 어느 날 밤늦게 치킨집에 큰아이를 데리고 가서 내 험담을 크게 하셨나 보다. 큰 아이는 할머니 얘기를 그대로 전하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댁으로 가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서가 정신과 다닌다는 얘기도 이 일 때문에 붉어져 나왔고 어머니는 이제 본인 집에서 생활을 하셔야 했다. 내 앞에서와 뒤에서 하시는 행동이 너무 달라 단칼에 끊어내고 싶은 사람이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남편의 어머니다.
이제 난 착한 며느리가 되지 않기로 했다. 시댁에 들어가기 전 매일 했던 안부 전화도 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매번 좋은 옷과 신발 같은 선물 또한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면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어머니의 이상한 행동에 왜 그런 거냐고 묻고라고 싶지만 어머니의 두 아들들은 말린다. 이제 네 어머니 하면서 수줍어하는 며느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타의 다른 눈으로 보면 내가 많이 변했고 나쁜 며느리라고 할 수도 있다. 외부적으로 보면 시아버님 살아계실 때와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도 있지만 마음이 바뀐 건 아니다. 굳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남들이 봤을 때 칭찬이 자자한 며느리가 아닌 좋은 며느리에 대한 해석이 변했을 뿐이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 어펙 테토스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라고 했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건들 때문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그저 열심히,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며느리 사표-
이제 홀로 되신 어머니도 어머니의 인생을 사신다. 예순이 넘어서 말이다. 나도 마흔이 넘어서야 어렴풋이 지금은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함이 맞다고 느낀다. 어머니나 나나 이제 제 인생을 살아내야 함을 느낀다. 어머니께서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하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다. 부모가 되면 그럴 수밖에 없다. 나만 부모가 되어 힘들게 고생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앞으로 내 자식들에게는 내가 너희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했느니 하는 키워드는 통하지 않는다. 일방적 희생이라고 반기를 들뿐이다.
적당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남편에게도 어머니에 대한 편집증적인 밀착은 좀 거두라고 얘기하지만 집안 내력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에게 대한 선을 긋는 것은 남이라는 뜻이 아닌 서로에 대한 존중임을 믿는다. 어머니도 남편도 내 자식도 내가 아니기에 실질적으로는 남이다. 서로가 한 배를 탄 동반자임은 틀림없지만 서로가 자신만의 색깔로 인생을 물들여야 구시렁거림이 없다. 남은 인생 얹어가는 것이 아닌 빛나는 내 인생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