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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May 07. 2020

난 더 이상 착한 며느리가 되지 않기로 했다.

작은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가장 많이 그리는 그림은 본인을 공주라고 상상해서 그리는 그림이고 현실감이 떨어진 엄마 그림도 많이 그린다. 그래서 본인과 엄마를 구분하기 힘든 그림일 때가 많다.     

미래의 공주가 된 본인 모습을 그리기도 하면서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는지 묻기도 한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딱히 할 말이 없다. 무언가 되고 싶었던 적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집안이 잘 사는 것도 아니지만 가난하게 느낄 만큼 힘든 건 아니었다. 졸업 때까지 용돈벌이 없이도 무난히 잘 다녔다. 귀가시간을 정해놓은 아버지가 무서워 어떻게든 그 시간을 지키려고 애썼다. 참 재미없고 무난하게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숨통이 막혔던 던 건 맞는데 부모님에게 반항한 다는 것이 두려워 객기 한번 못 부렸던 것 같다. 게으르고 귀차니즘 성격이라 연애도 오래 했다. 순서가 정해진 것처럼 결혼이라는 절차를 따랐다. 결혼한 지 일 년 반쯤 지나 큰 아이가 생겼고 본격적인 전업주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아이가 생기면서 무난하게 살아온 잔잔함에 무수히 많은 돌들이 던져졌다. 불만을 울음으로 표현하는 아기는 허구한 날 울어댔다. 밥을 먹이고 설거지를 할 때도 기어 와서 다리를 붙들고 울고 화장실 볼일을 볼 때도 울어댔다. 문을 열면 나을까 싶어서 열고 볼일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낮잠도 안 잤다. 밖에 돌아다니면 힘들거라 좀 자겠지 했지만 자기 발로 걸어 다니지 않았다. 아기띠나 유모차도 무용지물이었고 무조건 안으라 했다. 그렇게 10kg이 넘는 아기를 한 손으로 안고 동네를 돌고 나면 내가 먼저 지쳐 쓰러졌다.     

놀이터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미끄럼틀을 탈 때도 그네를 탈 때도 바닥에 주저앉아 모래놀이를 할 때도 옆에 앉아있지 않으면 많이 울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거부가 심해 학교 들어가기 바로 전 1년만 보냈다.     



시아버님 암투병이 한창일 때 큰아이 사춘기가 왔다. 자기만 바라보아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권도 학원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휴대폰을 몰래 변기에 빠뜨렸다. 휴대폰 주인인 아이의 엄마는 큰 아이를 일진으로 몰고 갔다. 사과를 해도 성의가 없다 했다. 울화가 치밀었다. 얼마 후에 편의점에서 물건도 훔쳤다. 편의점 cctv로 확인하니 사람들이 있나 없나 눈치를 보는 게 아니었다. 계산대 앞의 물건을 그냥 제 물건인 듯 주머니에 넣었다. 반 친구 물건들도 훔쳐서 큰아이와 친한 아이 하나가 나에게 편지를 써주었다. 시댁에 있었던 시절이었는데 어머닌 매일 눈물을 훔치는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오래전이지만 나의 치부를 동서한테 가서 그대로 흉보는 어머니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라 하고 속으로만 삭혔다.      


어느 날 어금니가 흔들렸다. 이가 흔들렸지만 그때는 남편에게조차 말을 못 했다. 이가 아팠던 것도 아니었고 충치가 있던 이도 아니었다. 멀쩡했던 어금니가 갑자기 흔들렸다. 병원에서도 이상하다 하고 스트레스받은 일이 있느냐 물었다. 흔들릴 당시에는 원인을 모르다가 치과의사 선생님의 물음에 무릎을 쳤다. 스트레스가 온몸으로 온 것을 말이다. 당시 아버님 암 치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내막은 모르지만 큰 아이가 사춘기가 온 것은 눈으로도 보이니까 다 그러면서 크는 것처럼 치부되었고 내 흔들리는 이도 뽑아버리면 마무리되는 일이었다. 아버님 일 이외의 다른 일에 대해서 이야기가 거론되는 건 그냥 하찮은 일이 되고 말았다. 네가 너무 신경을 써서 그리 되었구나가 아니라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이도 있는데 그깟 일들은 그냥 그런 일쯤으로 치부되었던 것 같다.


아버님은 골수까지 이식받는 큰 수술을 받으셨지만 퇴원을 며칠 앞두고 임종을 맞으셨다. 수술을 잘 진행되었고 퇴원까지 얘기가 오갔었던 때였는데 합병증이 갑자기 덮쳤다. 결국 이기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돌아가셨다는 말이 딱 맞게끔 세상을 떠나셨다.     



그 당시 시댁살이를 했지만 시아버님 돌아가시기 전 1년 전쯤 분가를 했다. 분가하는 과정에서도 내쫓기다시피 나오게 되었다. 생각이야 오랫동안 하셨겠지만 당장 빠른 시일 안에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말씀만 하셨다. 말씀만이라도 힘들겠지만 이만저만해서 그러니 따로 나 가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면 내가 더 죄송했을 듯하다. 말씀은 아버님께서 하셨지만 어머니 생각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일주일 만에 집을 얻어 분가했다.     



결혼하고 나서 분가 전까지 난 참 좋은 며느리였다. 친정 부모님보다 시부모님의 사소한 것까지 살뜰히 챙겼다. 친정 부모님이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입한 것도 있었다. 시부모님은 아들일이라면 만사일 제쳐두시는 분들이라 그분들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이 꼭 해서는 안될 일 같았다. 새댁 때는 멋모르는 며느리라 그랬고 새댁 딱지를 떼고 나서도 시어머니께서 내 속이 만신창이가 될 만큼 닳아 없어지게 했어도 참아야만 했다. 너무 억울해 시할머니를 붙들고 대성통곡한 적도 있다. 속사정을 아시는 할머니는 아가야 네가 참아야지 어떡하겠니라는 말씀으로 위로하셨다. 친정 엄마께 속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안 그래도 시집살이 힘들다고 걱정하시는데 마음이 편치 않으실 듯해서 번번이 안부 인사만 드렸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닌 우리 집에서 한 달간 머문 적이 있다. 머무시는 동안 우리 집에서 3~4일 정도 머물고, 일을 했던 동서가 쉬는 날에 맞춰서 하루 이틀 동서네 집으로 왔다 갔다 하셨다. 

그 당시 서울역 근처 재계발 주택이었던 동서네 집 실 거주 평수가 10평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집이었다. 일을 하고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컷을 텐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우울증을 앓으신 어머니는 그런 눈치를 못 채셨나 보다. 동서는 좋은 며느리처럼 행동하다 결국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만 머물게 되셨다. 어머니 얘기를 잘 받아주는 동서가 없으니 어느 날 밤늦게 치킨집에 큰아이를 데리고 가서 내 험담을 크게 하셨나 보다. 큰 아이는 할머니 얘기를 그대로 전하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댁으로 가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서가 정신과 다닌다는 얘기도 이 일 때문에 붉어져 나왔고  어머니는 이제 본인 집에서 생활을 하셔야 했다. 내 앞에서와 뒤에서 하시는 행동이 너무 달라 단칼에 끊어내고 싶은 사람이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남편의 어머니다.      





이제 난 착한 며느리가 되지 않기로 했다. 시댁에 들어가기 전 매일 했던 안부 전화도 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매번 좋은 옷과 신발 같은 선물 또한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면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어머니의 이상한 행동에 왜 그런 거냐고 묻고라고 싶지만 어머니의 두 아들들은 말린다. 이제 네 어머니 하면서 수줍어하는 며느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타의 다른 눈으로 보면 내가 많이 변했고 나쁜 며느리라고 할 수도 있다. 외부적으로 보면 시아버님 살아계실 때와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도 있지만 마음이 바뀐 건 아니다. 굳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남들이 봤을 때 칭찬이 자자한 며느리가 아닌 좋은 며느리에 대한 해석이 변했을 뿐이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 어펙 테토스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라고 했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건들 때문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그저 열심히,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며느리 사표-



이제 홀로 되신 어머니도 어머니의 인생을 사신다. 예순이 넘어서 말이다. 나도 마흔이 넘어서야 어렴풋이 지금은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함이 맞다고 느낀다. 어머니나 나나 이제 제 인생을 살아내야 함을 느낀다. 어머니께서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하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다. 부모가 되면 그럴 수밖에 없다. 나만 부모가 되어 힘들게 고생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앞으로 내 자식들에게는 내가 너희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했느니 하는 키워드는 통하지 않는다. 일방적 희생이라고 반기를 들뿐이다.   


       

적당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남편에게도 어머니에 대한 편집증적인 밀착은 좀 거두라고 얘기하지만 집안 내력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에게 대한 선을 긋는 것은 남이라는 뜻이 아닌 서로에 대한 존중임을 믿는다. 어머니도 남편도 내 자식도 내가 아니기에 실질적으로는 남이다. 서로가 한 배를 탄 동반자임은 틀림없지만 서로가 자신만의 색깔로 인생을 물들여야 구시렁거림이 없다. 남은 인생 얹어가는 것이 아닌 빛나는 내 인생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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