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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May 10. 2020

자퇴...새로운 레시피를 쓰다

스파게티를 만들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큰 아이가 저녁 메뉴로 선포를 했다


“엄마, 스파게티 만들어줄게요.”

“정말? 너 만들 줄 알아?”

“당근당근. 기대해.”

“어떤 파스타야?”

“알리오 올리오.”

“엄만 명란 파스타 먹고 싶어.”

“그래? 음........ 오케이”     


전날 인터넷과 유튜브로 재료와 만드는 방법을 찾아봤나 보다. 나가더니 면과 이것저것 재료들을 사 왔다. 부엌에는 얼씬도 못하게 해서 조용히 아이의 요리를 기다렸다.     


“엄마는 마늘이 많이 들어가는 거 좋아하는데......”     


요리하는 중간중간 내 취향도 넌지시 알려준다.     

 

“마늘 까는 거 엄마가 도와줄까?

“아니 내가 할 수 있어요.”

“셰프는 요리만 하셔도 되는데...... 잡스러운 것들은 내가 해 줄 수 있어,”

“힘들면 도와달라고 할게요.”     



마늘 볶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무언가 완성되어가는 소리와 냄새다. 

완성 접시에 근사하게 음식을 내어오고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늘과 명란을 잘 사용했고 간이 잘 맞아서 근사한 맛이었다.     


“정말 맛있네. 처음 한 음식인데 어쩜 이렇게 잘하니?”

"엄마 좋아하는 아보카도까지 넣으니 더 맛있다."


진짜 맛도 있었고 내 취향 본인 취향까지 다 고려해서 만들어내었다.     


“엄마 혼자 먹긴 아깝다.”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이만한 찬사가 없다. 아이도 기분이 좋았는지 다음을 또 기약한다.     


알리오 올리오라고 만든 파스타는 서로의 입맛에 맞춰서 정체모를 파스타로 변했지만 맛은 훌륭했다. 신혼 초 음식 할 때는 스마트 폰도 없었으니 요리 프로그램이나 요리책을 보고 많이 따라 했었다. 그땐 요리책에 나오는 재료가 하나라도 없으면 만들지 못했다. 대체할 수 있는 재료라도 생각지 못하고 꼭 책에 나오는 대로 만들었던 것 같다. 가끔 친정 엄마에게 어떻게 만드느냐 전화로 묻곤 했는데 애매모호한 표현, 예를 들자면 ‘조금’ ‘많이’ ‘적당히’처럼 기준 없는 표현들이 참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런 애매한 표현 때문에 애먹었던 경험이 있어 딸아이에게는 계량화해서 알려주곤 하는데 얘는 자기식대로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 계량스푼과 계량컵이 있음에도 사용하는 걸 못 봤다. 김수미 식대로 질질 질 세 스푼, 큰 국자로 하나, 생수병으로 반 병 같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계량하고 감을 믿는다. 재료를 섞기도 하고 좋아하는 재료를 추가하거나 없는 재료는 대체하는 능력도 보인다. 참 유연하게 해서 내가 한 수 배우기도 한다.     



아이는 자신만의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앞으로의 삶 또한 그러기로 결정했다. 검정고시를 쳐서 중고등학교의 공부를 빨리 끝내고 본인이 원하는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아이의 말을 존중하기로 말이다. 우선은 90일이라는 유예기간이 있지만 아이는 단칼에 무언가 새로운 모험을 떠나길 바란다. 친구에게 연연하는 마음을 접고 자신이 하고픈 일을 찾아 나설 수 있다는 면에서 작년보다는 조금 더 성장한 듯하다. 15살 중 2학년이다. 한창 친구들이 좋은 나이이고 놀고 싶을 텐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아이가 대견하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사실 걱정이 더 앞선다. 남편과 난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라 아이의 선택이 많이 혼란스럽다. 뜨거운 시선들을 감내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을 테고 여린 마음에 상처도 많이 받을 텐데 말이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처럼 자신의 옹골찬 신념으로 세상과 등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남들이 자주 걷지 않은 길을 택하여 과정들이 다르겠지만 나이가 이만큼 먹고 보니 어려움이 날 더 크게 성장시켰던 것은 분명했다.      



모든 난관을 다 제거하고 좋은 길로만 안내하는 것이 부모다움인지 묻는다. 아이가 어려움 없이 지름길로만 잘 성장하길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한결 된 마음이다. 아프게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들기에 조금 쉬운 선택 지을 주고 내가 하라는 방식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한건 아닌가....


아직까지 자퇴란 학교 다니기가 문제가 많은 아이들이 거치는 수순처럼 여겨진다. 많은 편견의 시선에서 자유로울수가 없다. 내가 아픈 것보다 철 모르는 아이가 겪는 아픔은 더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이다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어제를 버리고 다른 미래로의 디딤을 맘껏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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