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 May 11. 2020

슬기로운 며느리생활

토요일은 남편이 쉬는 날이다. 식구들 모두 쥐 죽은 듯 늦잠을 청하는 날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하나씩 일어나고 남편도 일어났다.


오늘 같은 날은 아점을 먹는다. 어제 먹고 남은 수육을 좀 데웠고 새우젓 무침은 번거로워 물김치와 새콤이 익은 맛김치와 곁들여 먹었다. 요즘 햇양파와 오이 고추를 된장에 찍어먹는데 그 바람에 된장소스를 맛나게 만들었다. 된장소스와 수육도 제법 잘 어울리는 궁합이다. 부추무침이 있음 제격이었을 텐데 없어서 아쉬웠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으니 오후 1시가 다 되어간다. 휴일이 많지 않은 아빠와 밖에 나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비가 주룩주룩 온다. 남편과 아이들이 김포에 있는 빵집에 가보자는 말이 나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갔는데 소문대로 어마어마하게 큰 빵집이다. 빵집 이름이 ‘식빵 연구소’다. 빵집이라고 표현하기엔 덩치가 제법 크다. 큰 건물이 3채 정도 된다.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붐볐다. 식빵이 주메뉴 같지만 식빵보다 팥빵 맛이 좋았다. 소도 풍성히 들어갔고 너무 달지도 않아서 뜨거운 커피와 먹으니 제격이었다.



종류별로 고른 빵을 먹어보고 나가는 길에 아이들이 팥빵과 크림빵만 더 사가자고 했다. 남편은 거들어 어머니 것도 사가자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먼저 했을 얘기인데 내가 안 챙기니 남편이 얘기한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하다못해 치킨을 배달시켜 먹어도 남편과 함께 있으면 어머니 부를까라는 말이 나온다. 좀 눈치껏 들이대면 좋은데 이 남자는 어머니 생각밖에 안 나나 보다. 팥빵을 좋아하시기도 하고 어머니께 방문을 안 한지도 오래되어 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난 어머니 댁에 잘 들르진 않는다. 남편, 아이들은 자주 방문하지만 난 할 일이 있거나 읽어야 할 책이 있다던가 글을 쓸 때는 가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 않더라도 남편은 혼자 다녀올 때도 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한다. 같이 가지 않아서 서운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주 방문하지 않는 것뿐이지 내가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남편이 갈 때마다 같이 동행해 착한 며느리 인척 살뜰히 챙기는 척 같은 행동은 안 하는 것뿐이다.  척하는 걸 벗어던진 것뿐이다.


      

어머니 댁에 갔더니 계시지 않으셨다. 전화를 하니 근처에 사는 시동생 집에 가 계시다고 했다.  서둘러 가겠노라 하시며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께서 들어오시자마자  어쩐 일이냐고 물으신다. 너무 오래 안 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3월에 아버님 제사 때 오고 처음인 것 같다. 빵집에 갔다가 어머니 좋아하시는 빵이 있어서 들렸다고 말씀드렸다.     



냉장고에서 과일을 주섬주섬 내오신다. 예전에 나라면 꺼내기가 무섭게 과도와 과일들을 쟁반에 담아 접시에 이쁘게 차렸을 텐데 지금은 손님처럼 어머니께서 깎아주시는 과일을 먹는다. 손님처럼 행동했다. 처음엔 이것도 어색했다. 내가 먼저 챙겨 오지 않으니 언젠가부터는 어머니께서 깎아서 내오셨다. 뒤에서 못된 며느리라 욕을 하실망정 내 앞에서는 좋은 얼굴로 내오신다. 뒤에서 욕하는 것까지 미리 신경 쓰진 않는다. 가끔 뵙고 내 쪽에서 선을 그으니 이젠 그려려니 하시는 것 같다.  


나의 아랫동서는 여전히 "네, 어머니"  하며 곰살맞게 군다. 이런 며느리도 있고 저런 며느리도 있는 법이니까. 오히려 다행이지 않나 싶다. 나 이외에 아들 둘과 작은 며느리는 어머니라면 집에 있는 솥뚜껑까지 다 내어줄라 하니 나 같은 헐렁한 하나쯤 있어도 괜찮다 생각했다.


빵만 드리고 오려했던 의도는 빗나갔다. 남편은 저녁까지 먹고 갈 기세다. 으이구!!!

어머닌 저녁을 차리시기 위해 김치찌개 끓여낼 준비를 하셨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다. 읽던 책이나 마저 보고 있어라."

"네, 어머니. 손 가는 일 있음 말씀하세요."


싸가지없다고 생각하실라나?

앉아서 제 볼일 보란다고 그대로 하는 눈치 없는 며느리가 도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작동했지만 그냥 눈치 없는 사람인 듯 앉아있었다. 그래도 집안의 굵직한 일들은 아직까지 내 차지다. 저녁 정도는 어머니가 차려주실 수도 있지. 난 어머니 집에 방문한 손님이니까 말이다.



책과 노트, 필기구들이 눈에 띄었다. 요즘 역사책을 보시는 것 같다. 소파 앞에 테이블, 소파 위, 티브이 옆 식탁, 침대 옆 협탁 곳곳에 책들이 보인다. 어머니는 작년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한 달간 우리 집에 계시면서 책을 읽기 시작하셨다. 예순 중반인 나이부터이고 이제 1년 된 신참내기 독서가시다. 신기한 건 독서를 처음 시작하신 분인데 꾸준히 읽으신다는 거다. 가끔 집에 오셨을 때 책을 빌려가기도 하시고 나또한 아이 편에 어머니 읽을만한 책을 들여보내기도 한다. 예전엔 가방이며 신발, 옷들을 많이 사드렸다. 생일 때, 명절 때, 어버이날 때... 갈수록 금액도 늘었고 부담도 늘었지만 부모님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이렇게 늘 자식들이 사 드리는 것만 사용하시다 보니 어머니는 본인의 취향마저 잃어가시는 것 같았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더 크게 와 닿았다. 필요하신 것이 있는데도 못 고르시겠다고 하셨다. 이제 혼자 사시고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좀 매정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작은 부분부터 어머니가 선택할 수 있게끔 했다. 가족들 음식은 만들어오셨으니 먹거리들은 잘 챙기시는 부분이었고 티셔츠 한 장씩, 머리핀 하나 작은 부분부터 조금씩 본인 취향을 만들어가셨다. 새로 산 것들을 착용하고 오시면 멋지다고 잘 선택하셨다고 말씀드기도 했다. 어머니께 어울리는 색상도 말씀드리기도 하고 말이다. 듣기 좋으라는 빈 말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을 격려드리고 싶어서다.     



소소하게 시작하는 어머니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드린다. 착한 며느리의 옷을 버리고 미움받을 용기를 받아들이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는 방법들을 터득해갔다. 어머니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부분도 생겼다. 내 앞에서 대놓고 욕하시는 분은 아니라서 내 앞에선 쿨한 척하신다. 나중에 아들들에게 한소리 하실지언정 말이다.     



어머니께선 항상 우리 집에 오실 때 연락도 없이 오셔서 현관 앞에서 문을 열라고 부르셨다. 갑자기 방문하시면 좀 당황스러워서 남편에게 먼저 부탁했다. 어머니께서 출발하실 때쯤 먼저 전화를 달라고 말이다. 남편은 어머니 기분 좋을 때 눈치껏 오시기 미리 전화를 먼저 달라고 전했나 보다.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으면 헛걸음치니 먼저 전화를 달라고 말이다.

“왜 또 지랄하냐?”

남편과 맥주 한잔 할 때 들은 얘기다. 표현은 이렇게 하시지만 이젠 전화는 주시긴 한다. 우리 집 도착 전 1~2분 전쯤 말이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니 전하는 말씀대로 바로 되진 않는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씩 편한 방법들을 들이대면서 얻어지는 것 같다. 17년 결혼생활은 그리 호락호락한 삶은 아니었다. 이제 단단히 입은 갑옷은 좀 벗어던지고 헐렁한 사람,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서점 갈 때 어머니 좋아하실만한 책 한 권 구입해야겠다. 책은 어머니가 고르시기 참으로 힘든 것 중에 하나다. 설민석 씨 책을 좋아하신다. 설민석 씨가 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시고 역사에 더 흥미를 느끼시는 것 같다.  하얀 노트에 꾹꾹 눌러쓰신 어머니 손글씨처럼 내 마음에도 슬기로운 며느리가 되게끔 눌러 적어본다.

         


작가의 이전글 자퇴...새로운 레시피를 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