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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May 18. 2020

열무국수 만들어 먹다가 울컥했다.

이제 초여름이라 말해도 무색하다. 한 낮 외출은 가슴골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게 한다. 긴 소매가 답답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난 더위에 많이 약하다. 추위도 싫긴 하지만 추우면 덧입거나 목도리라도 두르면 되는데 더위는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다. 더위도 잘 참긴 하지만 어느 수위를 넘기기 전에 외출을 마쳐야 한다. 참고했다간 몇 날 며칠을 고생하니까....     


더위가 싫은 또 다른 이유는 아이들이 모기 알레르기가 있어서다. 모기에 물리면 물린 자리만 봉긋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물린 부위 전체가 땡땡하게 부어오른다. 아이가 어릴 적 얼굴과 눈 주변을 물렸는데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어있었다. 아이들도 잘 알기에 더워지면 놀이터도 잘 못 나가고 특히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런 더위에도 날 지탱할 수 있게 하는 음식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열무김치다.


봄이 시작되면 여린 열무가 나온다. 햇 열무라 촉감도 보드랍다. 얼마 전 햇 열무로 열무김치를 담갔다. 절일 때 너무 손으로 만지작거리면 풋내가 날 수 있어서 조심히 다루는 것이 좋다. 소금을 얹어서 절이는 것보다 소금물을 만들어 절이는 것이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짧은 시간에 골고루 잘 절여진다. 작년 고추청을 만들었는데 고추청과 함께 붉은 고추를 성글게 간다. 열무 절이는 동안 밀가루 풀을 쑤어서 식혀 놓는다.      

절이기만 잘했다면 거의 다 된 것이나 다름없다.


성글게 간 고추 물과 밀가루풀, 기본 김치 양념이면 간단히 만들어지니까......

요즘은 더워져서 반 나 절정도 밖에 두었다가 김치냉장고에 넣으면 먹기 좋게 잘 익는다.     

열무가 새콤이 익어갈 때면 열무 국수를 준비한다.

비빔국수도 좋지만 열무 국수 때문에 국물을 넉넉히 만드는 편이다. 물김치보단 적고 일반 김치보다는 많게 말이다. 아이들도 같이 먹을 거라 간도 슴슴히 한다. 빨리 익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먹는 내내 맛있게 먹기 때문이다. 


열수 국수를 할 때 배를 좀 갈아서 김치 국물과 혼합하면 간이 적당히 맞다. 입이 까끌거려 입맛이 없을 땐 식초 몇 방울, 겨자를 살짝 추가해서 먹기도 한다. 입맛 없는 여름엔 정말 이만한 음식도 없다. 매일매일 지겨울 만큼 먹는다. 남편이 걸신이 들었다 할 정도로 말이다.     


국수만으로 속이 좀 허하다 싶으면 대패 삼겹살과 같이 먹기도 한다. 얇게 저민 고기라 국수와 먹기가 좋다. 보통 국수는 점심으로 많이 먹지만 고기와 싸 먹는 국수는 저녁에도 좋다. 비빔국수 하나, 열무 물국수 하나 만들어 고기에 싸 먹기도 하고 쌈에도 싸 먹기도 한다.     


남편이 집에 있는 날엔 청국장을 끓여 같이 비빔밥을 먹기도 한다. 꽁보리밥을 앉히고 두부 많이 넣은 청국장을 끓여낸다. 비빌 때 두부를 많이 얹어서 비비면 고소함과 새콤한 맛이 잘 어울린다.      

결혼 전엔 이 맛을 잘 몰랐다.


마흔이 넘어가고 나서 어렸을 적 먹었던 맛을 찾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너무 묵직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맛이 좋다. 날로 먹는 열무는 풋내만 나지만 양념과 어우러져 발효를 거치면 여름에 더위를 이길 수 있는 시원한 맛이 난다. 배추나 무와는 다르게 다른 음식으로 활용이 덜한 채소이지만 한 여름을 나기에 이만한 음식도 없는 듯하다.           




몇 년 전 시댁서 살 때 여름이면 국수를 많이 먹었다. 시아버님이 국수 음식을 많이 좋아하셔서 하루 한 끼는 꼭 국수였다. 손 많이 가는 음식은 아니니 식구들 먹고 싶다고 하면 휘리리 비벼먹기도 하고 물국수 해서 먹기도 했다. 새콤달콤 무친 비빔국수, 시원한 열무국수도 여름 내내 끊이지 않고 먹었다. 식구들이 많아서 국수 한 그릇 먹어도 잔칫집 같았다. 시댁에서 분가한 지 2년이 좀 넘었지만 요즘 작은 아이가 하루 한 끼는 국수를 달라고 한다. 할어버지 닮았나 보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분가 후 몇 개월 뒤 시아버님이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 한 여름에도 암센터 병동은 패딩점퍼 입은 환자들로 가득하다. 길을 가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더운 날 좀 더워 보이는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암센터 시아버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한여름인데도 환자복 위에 두꺼운 패딩을 걸친 모습, 항암제를 맞고서는 부작용으로 입안이 다 헐어서 물도 못 삼키셨던 모습 말이다. 국수를 그리 좋아하셨는데 국물 한 숟가락을 못 넘기셨다.


오후 늦게 남편과 아이들은 혼자 계신 어머니 댁에 갔다. 혼자서 간단히 한 끼 때우려고 열무국수 한 그릇 만들었다. 국물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는데 쓰라려 거울을 보니 아랫잇몸에 하얗게 입병이 돋아있다. 입병을 보니 예전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스승이 죽은 뒤 6년 상을 치렀다. 자식도 아닌데 말이다. 오래전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자공이 부유하니까 여유가 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부했다. 시간이 지난 일이긴 하지만 내가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마음이 없었으면 자공처럼 수년을 한 사람만을 위해 독백할 수 있었을까 되물어본다. 시어머니께서 1년 내내 힘들어하시는 것을 지켜보는 것조차 참기 힘들어했다. 한두 살 나이가 먹으니 가식적인 것은 오래 지속할 수가 없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슬픈 감정은 기쁨보다 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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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먹을 때마다 아버님 생각이 나는 건 아니지만 오늘 만든 열무국수를 한 젓가락도 못 뜨는 이유가 내 입병 때문일까 아련한 추억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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