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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May 15. 2020

손가락 지문이 사라졌다

직장을 다닌 지 2년 정도 지났다. 마흔이 넘어서 시작한 일이라 늘 좌충우돌이다. 수개월 전부터 친정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그만두셨다. 사업소득이 없어져서 건강보험을 우리 쪽에 같이 두었으면 하셔서 직장에 얘기했더니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 몇 장을 발급받아 오라 했다. 동사무소에 들르니 신분증을 요구했고 지문을 인식하는 기계에 손가락을 대라고 했다. 몇 차례 손가락을 갖다 대도 지문이 인식되지 않았다. 이런 일이 흔한지 직원은 별 말이 없었고 신분증과 본인 확인을 거치고 원하는 서류를 발급해 주었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동사무소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했더니

“네가 뭘 한 게 있다고 지문이 없냐?”

“그러게. 집에서 팽팽 놀았던 여자가 지문이 없어지는 게 이상하네.”

내 말투에서 가시가 느껴졌는지 남편은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남편 말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시장에서 장사하셨던 시어머니가 지문이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자기 마누라가 지문이 없는 건 이상한 일인가? 아님 일과 육아 모두 성공하지 못한 엄마라서 일까? 전업주부라도 재테크에 성공해서 남편 기좀 살려줬더라면 괜찮았으려나?


어릴 때부터 유별났던 큰 아이 키운 15년은 잊었나 보다. 아이를 펜대 굴려가면서 키운 것도 아니고 온전히 키운다는 것은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기본적인 생활 즉 허드레 일이다. 깔끔쟁이로 키우는 걸 포기했음에도 아이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삼시 세끼 밥 해 먹이는 것, 씻기고 놀아줘야 하는 것 모두가 전업 주부였던 내 몫이었다. 조금 커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 숨통이 트인다라고 생각했나 보다.     


우리 집은 큰아이가 먼저 학교에 가고 작은 아이가 다음으로 유치원에 등원한다. 작은 아이가 유치원 다니기 시작했을 땐 시댁에서 살았다. 시부모님은 주말에만 들어오시지만 시할머니가 계셨다. 남편은 오후 3시쯤 출근한다. 남편 출근 후 작은아이가 하원하고 큰아이가 하교한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들로 저녁시간은 정신이 쏙 빠진다. 저녁 먹고 나서 얼마 안 있음 남편이 퇴근한다. 늘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다. 남편 식사를 차려주고 잘 때쯤 되면 작은 아이의 잠투정이 시작된다. 단 한순간도 내 시간이 없었다.     



시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큰아이가 유아기였다. 보통 첫애들은 깔끔쟁이로 키워진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경향들이 많다. 내 몸 돌보지 않고 아이에게만 올인된다. 아이가 어떤 상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산스럽지 않고 얌전하며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전업주부로서 외부에 평가받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미술이나 음악이라고 배우는 것을 봐도 대부분 깔끔하게 진행되는 것들은 없다. 몸으로 배우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영어를 솰라솰라 잘하고 초등학생들이 배우는 수학 문제까지 섭렵한다면 전업 주부 중에서도 능력자에 속한다. 거기에 책도 많이 읽어줘야 한다. 내 몸이 부서질 때까지 아이에 올인해야 한다. 그래야만 외부에 비치는 거울로는 전업주부지만 대기업 회사의 임원이라도 되는 양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다.     



아이가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술술 따라준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문제가 일어난다면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집에서 뭘 하길래 아이 하나 제대로 못 보냐는 시선을 거둘 수 없다. 사실 아이에게 문제가 발생하는 건 신데렐라가 공주로 한 번에 싹 변하듯 바뀌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문제들이 쌓이면서 일어나는 일인데 말이다. 주 양육자며 전업 주부가 모든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이렇게 15년 전업주부 생활을 했다. 그리고 큰아이가 6학년이 되면서부터 일을 시작했다. 직장맘이 되고부터는 더 해야 하는 것들에서 내려놓는 것들을 배워야 했다. 내가 집에 있을 땐 이쁜 머리 총총 묶어서 구색 맞는 이쁜 옷들을 챙겨 입혔는데 남편이 아이 유치 원보 낼 때 찍어 보낸 사진은 헝클어진 머리, 언발란스한 상하의, 햇볕이 쨍쨍인데 목이 올라오는 양말에 화려한 구두까지 입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핑크데이라고 해서 핑크색 옷을 입혀 보내야 함에도 잊어버리고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보내기도 여러 번이었다. 놓치는 것, 빼먹는 것 투성이었다.     


퇴근하고 헐레벌떡 뛰어와도 작은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올 수가 없다. 종일반에 보내면 거의 7시가 다 되어 하원 해야 한다. 나야 좀 편할 수 있지만 직장인도 아니고 아침에 가면 밤에 오는 아일 생각만 해도 마음 아파 유치원 하원후 집 근처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피아노 학원에 보내면 내가 아이를 데려가는 시간에 간신히 맞출 수 있다. 아이와 집에 오면 저녁을 차린다. 먹이고 씻기고 숙제 봐주는 일만 끝내도 7~8시가 된다. 두 아이는 서로 엄마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큰 소리로 떠든다. 유치원 얘기, 학교 얘기를 듣고 있는 중에도 졸음이 쏟아진다.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릴 수가 없다. 반찬 두 어가지 만들어놓고 먼저 잠자리에 든다.

    

전업맘이어도 직장맘이어도 전투적으로 살아야만 했다.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말이다. 옛날 시골 할매처럼 매면서 아이를 돌보지 않더라도 시어머니처럼 장사를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기쁨도 컸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부딪히지만 막상 상황을 맞이할 때는 힘든 순간이라는 걸 몰랐다. 다 지나고 보니 참 어려운 순간이었지만 잘 지내왔다고 나를 격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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