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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Apr 30. 2020

밥 좀 지어 볼까요

칙칙 칙칙.....

남편이 퇴근하기 전 밥을 짓는다. 칙칙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불을 바로 끈다. 고슬고슬한 쌀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밥이 다 되어 뚜껑을 열자마자 하얀 연기가 자욱하다. 풍기는 밥 냄새가 구수하다.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부터 압력밥솥의 밥만 먹어온 터라 결혼한 후에도 선택의 여지없이 압력밥솥 밥을 먹었다. 난 현미밥을 따로 지어먹고 아이들은 좋아하는 밥을 선택해서 먹는다.

신혼 초 전기밥솥을 잠깐 사용했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압력 솥밥만 먹다 보니 좀 번거롭더라도 다시 찾게 되었다.     


큰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입덧이 많이 심했다. 가장 힘든 건 밥 냄새였다. 결혼 이전까지 아니 신혼까지도 밥 냄새가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의식하고 살지 못했는데 큰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그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밥을 완성하고 나서보다 밥이 지어질 때 퍼지는 냄새를 도저히 맡을 수가 없었다. 안정기에 들 때까지는 많이 사 먹기도 했지만 입덧 때문에 그마저도 힘들었다. 


    

요즘은 코로나로 아이들이 집에 있다. 보통 아침과 저녁은 밥을 짓고 점심은 간단히 먹던가 아님 건너뛰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도 있듯이 남편도 그렇고 아이들도 갓 지은 따뜻한 밥 한 공기만으로도 별 반찬 없이도 잘 먹는다. 갓 구운 김과 곰삭은 파김치만 싸서 먹어도 한 그릇 뚝딱 비운다. 여기에 집된장에 향긋한 냉이 넣고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된장찌개 정도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봄이 되면 흔하디 흔한 달래 한 묶음 사다가 송송 썬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맛간장에 마늘과 참기름, 참깨만 솔솔 뿌려 넣어 달래장만 만들어 구운 김에 싸 먹어도 밥도둑이 따로 없다. 밥이 맛있다면 이런 소박한 밥상도 근사하게 변신시킨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어떤 요리와도 환상 조합이다.   


  

밥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음식 중 하나가 초밥이 아닌가 싶다. 초밥 장인들은 밥에 대한 철학이 깊다. 어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입안에서 퍼지는 밥알 하나하나의 촉감, 질감이 아주 스탠더드 하다. 하지만 지루함이 없다. 기본과 절도가 있는 밥 위에 올라가는 재료에 따라 창조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가장 사랑한 음식이기도 한데 이런 단순함에서 뻗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로움과 창조의 매력 때문이지 않을까?     




가끔 별미로 보리밥을 짓기도 한다. 초여름 여리디 여린 열무가 나오기 시작하면 밀가루 풀 쑤어서 열무김치를 만든다. 더워지기 시작하면 한나절만 익혀도 국물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는데 이때 김치 냉장고에 보관하면 몇 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열무김치가 새콤하게 잘 익어갈 때쯤 꽁보리밥을 짓는다. 미끌거리는 식감 때문에 쌀밥에 섞어서 먹을 때가 많지만 보리쌀로 만으로 밥을 지어 열무김치에 쓱쓱 비벼먹으면 이런 별미가 따로 없다. 육수 진하게 내어 온 동네에 쿰쿰한 냄새가 퍼질 만큼 청국장을 끓인다. 뚝배기에 무나 호박이 설컹설컹하게 익을 때쯤 두부도 큼지막하게 썰어 넣어준다. 심심한 청국장을 보리밥에 넣고 먹기 좋게 넣고 새콤히 익은 열무김치까지 얹어 쓱쓱 비비기만 하면 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바로 그 맛이다. 입에 넣자마자 아~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릴 땐 청국장은 냄새 때문에 그리 좋아하진 않았는데 나이가 한 살 두 살 얹어지니 이런 음식들이 기억 속에서 메아리친다. 어릴 때 먹던 그 희미한 기억을 쫓아가 정취를 느껴본다. 

엄마가 해주신 청국장은 냄새가 더 고약했던 것 같은데 요즘 파는 청국장은 냄새가 좀 덜 한 것 같다. 그래도 바글바글 끊일 때면 내가 청국장이야라는 위엄을 온 동네에 알리는 녀석이다.     



식당에 갔을 때도 밥이 맛있는 집이 좋다. 메인 메뉴야 애써서 재료 듬뿍 넣고 조리하니 맛있는 맛이 당연하겠지만 밥은 물 양으로만 승부하는 음식이다. 뜸을 오래 들이면 진밥이 되고 너무 많다면 떡밥이 된다. 또 물이 적다면 꼬들한 밥이 되거나 타기도 한다. 식당에서는 찐 밥이 나오기도 하는데 편의점 가서 햇반이라도 사 오고 싶은 심정이다. 밑반찬에 잘 지어진 밥 한 공기 만으로도 참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 처음 가는 식당인데 밥 맛만 보더라도 맛 집인지 구별된다. 15년 동안 밥을 지어온 밥 전문가라서 잘 지어진 밥집만으로도 그 집 음식 맛을 조용히 가늠해보게 된다.      



내 살림살이 중 아니 집안에서 소유한 가장 비싸고 오래된 물건은 압력밥솥이다. 한 개도 아니고 크기별로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조리 도구엔 커다란 욕심이 없다. 그냥 내가 원하는 음식이 조리될 정도면 된다. 가족들이 좋아하거나 또는 힘을 주고 싶은 요리는 압력솥으로 많이 해결하기 때문이다. 시댁에 입성할 적 모든 주방 물건들은 버렸는데 요 압력밥솥만은 챙겨 들어갔다. 전기밥솥 사용하는 어머니께도 압력 밥솥 사용법을 알려드렸는데 처음 사용해 보신 어머니는 터질 것 같다고 좀 무서워하셨다. 분가할 때도 요 밥솥들만은 다 챙겨 나왔다. 나의 밥솥 사랑은 지극하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용하는 아이들이다 보니 더 그렇다. 나와 15년을 함께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오랜 시간 함께 한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남편과는 7년이 넘게 연애를 했고 우리 부부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마주했다. 기억도 희미해지지만 양은 냄비처럼 으르르 끊던 연애감정은 첫맛으로만 맛을 가늠하기 어려운 가마솥 안의 뭉근히 끊여낸 사골국 같은 맛이 되었다. 오램을 지켜낸 묵직한 맛이다.      



무언가 오랜 세월을 지켜낸 것들은 분명 차이가 있다.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넓어짐과 동시에 깊어짐을 가질 수 있다. 매일 같은 일의 반복이지만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새로움을 알아가는 것 같고 부분과 전체를 아우를 수 있게 되었다. 아직까지 15년뿐인 육아에서 그리고 매일의 일상이 반복되는 집밥에서 그것의 소중함, 위대함을 느껴본다. 그리고 순간의 삶,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미래도 내 것이 된다는 명확한 이치의 깨달음이다.           



유유자적한 삶의 근본은 가볍게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로 깊어지는 것이다

큰 배를 띄우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만 더 깊어져야 한다.

                                                                                                                               -마흔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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