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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Aug 06. 2020

시어머니의 분리불안이 시작되었다.

어젯밤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오늘도 하루 종일 비다. 매일 놀이터에 나가 놀던 작은 아이도 밖을 나가지 못하니 지루한 모양이다. 큰 아이는 미술수업을 다녀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아님 내일 친구와의 약속 때문인지 어려운 함수 부분을 공부하면서도 싱글벙글하다,


작은 아이가 계속 국수를 해달라고 졸랐다. 꽁무니 따라다니며 해 줄 때까지 끝을 볼 것 같다.

시댁에서 살 때는 시아버님이 국수 음식을 많이 좋아하셔서 여름이면 늘 한 끼 정도는 국수를 먹었다. 7명의 대식구라 양도 어머어마했고 양이 많으니 국수는 늘 살짝씩 불어있었다.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비빔국수는 정말 많이 달았다. 단 음식을 대체적으로 좋아하시는 편이긴 했지만 아버님이 드시는 비빔국수는 그 상상을 초월한 단맛이었다. 다른 식구들이 너무 달다는 불만이 있자 어머니는 적당히 무쳐서 아버님 것만 설탕 한 스푼씩을 더 추가했다.


남편은 어릴 적 부모님과 추억들이 많은 것 같다. 시가 쪽 식구들과 밥을 먹을 때 그런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가난했지만 엄마가 해주었던 음식들, 가족들과 놀러 가서 생긴 에피소드들이 가득이다. 자식이라고 부모의 많은 일들을 일일이 챙기긴 어려운데 남편과 시동생은 시부모님 일이 가장 우선이다. 아마도 많은 추억거리들이 남편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은 듯했다.


한 번은 새벽 2시에 남편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통화가 금방 끝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어머니 댁 텔레비전이 먹통이라고 했다. 남편이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다녀오겠다고 했다. 난 자다가 일어나서 좀 짜증이 났었다. 마치 어머니가 정부를 골탕 먹이려는 내연녀 같았다. 내가 어머니라면 내 자식들이 일하고 피곤할 것을 먼저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일로 남편과 말다툼을 한 적도 있었다. 남편은 어머니가 그냥 전화해서 본인의 상황을 얘기한 거고 시간대가 어찌 되었든 찾아가는 건 남편의 자유의지라고 했다.


"다녀올라고? 어머니가 당신 오라셔? 그런 일이라면 내일 전화할 수도 있는 일이잖아. 당신이 지금 간다 해도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남편은 말이 없었다. 먼저 자라고만하고 다녀오겠다 하고 나갔다. 한번쯤은 내 맘을 읽어주면 좋으련만...

밤 11시에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전화가 올 때도 있었고 운동하는 바이크가 이상하다며 전화주신 적도 있었다. 가스레인지의 건전지를 교체해 달라며 큰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교대로 전화를 돌리셨다. 늘 해결이 불가능한 시간대에 전화가 오는 경우가 많았다. 내 아들이 올 거니까 며느리 너는 무슨 상관이냐는 식 같다.

남편은 내일 가서 보겠다는 반응이 아니라 전화를 끊자마자 다녀온다. 이런 남편의 반응때문에 더 그러신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남편도 시동생도 정말 효자다. 시동생은 정말 욕이 나올 정도로 효자다. 시부모님이 효자, 효부라 자식들이 보고 배운 건 아니다. 내 시어머니는 시할머니께 못된 며느리 쪽이었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는 다툼이 많았다. 객관적 입장에서 보아도 시어머니의 억지스러움이 더 컸고 동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서 쓴웃음이 지어질 때가 많았다. 며느리인 내가 언급할 수 없는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남편과 맥주 한 캔 하면서 어머니 얘기를 할 때가 있다. 시부모님은 효자스러움과는 거리가 먼데 당신이나 삼촌은 정말 효자라고 말이다.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큰다던데 당신 형제들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했다.

"남편, 어머니가 예전에 그러시더라. 시아버님이 효자였으면 자식이고 뭐도 집을 나갔을 것 같다고 말이야.

당신한테 어머니와 나를 선택하라는 곤란한 질문을 하면 당신의 반응이 어떨지도 궁금해지네.

내가 할머니 살아계실 때 대면 대면했던 게 많이 후회가 돼. 할머니께 무관심했던 건 어머니 뜻에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를 위함이었어. 내가 할머니께 관심이 가는 물음이나 용돈을 드리면 어머닌 할머니를 궁지로 모셨으니까. 모든 관심이 다 어머니에게로만 쏠려야 됐잖아. 그때 어머니께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이라도 드려볼걸 말이야."


"어머니께서 새벽에 전화하시는 게 시급을 다투는 일도 아니고 해결될 수 없는 것도 본인이 뻔히 아실 텐데 말이지. 내가 꼬인 건지 모르겠지만 예전 할머니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를 궁지에 몰고 저울질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


남편은 알고 있다면서 말을 아꼈다. 알지만 어머니라서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했다.나는 평소에 입밖에 올리지도 않은 말들을 술김에라는 명목으로 쏟아부었다.


내가 봤을 때는 남편은 시부모님과의 추억들이 너무 많다. 아마 마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게다.

자식들에게 엄하셨던 시아버님과는 달리 시어머니는 늘 자식들 일이라면 열일을 재쳐두셨다. 늘 자식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손수 해주셨다. 결혼한 지 16년이 되었어도 아들이 잘 먹었던 그 음식들은 여전히 남편 손으로 배달된다. 가난했던 기억도 고생스럽게 가족끼리 여행 갔던 이야기들도 머릿속 생생히 가득하다. 명절 때며 가족 모임 때면 내가 모르는 오래된 이야기들로 꽃을 피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연이 담긴 음악에 취해 두 아들들과 정담을 나누신다.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단지 음식을 하고 치우는 일만 아니라면 굳이 여기 있을 필요가 없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 멍청한 아들 둘은 며느리에게 전담할 여지를 안주기도 하고 어머니 또한 행복해하시니 말이다. 차라리 일하는 사람을 사서 보내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내가 본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이미지보다 시아버님과 두 아들들이 보호해줘야 하게끔 행동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해가 지면 아파트 엘리베이터도 혼자서 못 타시고 낯선 곳에선 화장실도 혼자서 못 다녀오신다. 난 아이 둘을 낳아서 키우다 보니 여장부처럼 변해가는데 어머니는 아들 둘을 키우셨음에도 여리여리 꽃처럼 행동하실 때가 많다. 그래서 결혼한 지 16년이나 지났음에도 어머니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긴 하다. 타고난 성격 탓이겠거니 하지만 시아버님과 자식들 앞에선 꽃 같은 분이 시할머니 앞에선 암사자의 모습으로 기억되어서 그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정서적 의존이 심한 어른은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게다가 당신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든지 간에 또다시 새로운 문젯거리를 만들어냅니다. 의존적 관계에 매달리는 가족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이 곁에 가까이 있는 겁니다. 문제가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죽겠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의 정서적 의존은 더 심해지셨다. 배우자가 없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겠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혼자 못 지내셨다. 효자 아들 둘은 서로 자신의 집에 머물라고 했다. 한 달여간 우리 집과 시동생네 집에 왔다 갔다 하시며 지내셨는데 우리 집에서도 문제가 너무 많았고 동서는 우울증 약까지 복용해야만 했다. 어머니 일로 두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두 아들들이 죽겠는지 어머니를 댁으로 가시라 했다. 혼자 잘 지내야 여럿이 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말이다.



딸만 둘 있는 나는 평생 시어머니는 될 수 없으니 감정을 어림짐작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요즘 이렇게 아들에게 의지하고 사는 부모가 있을까싶다.

더 독립적인 엄마로 나아가길 희망한다. 내 들이 여리디 여린 것이 여성의 정체성이 되기를 거부한다. 남편이 있어도 일과 살림을 병행할 수 있어야 하고 아이들이 커서 내 옆에 없어도 나 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자식바라기가 되고싶지 않다.

어머니는 이렇게 거칠어진 나를 여자답지 못하다고 하실 때가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화장도 하지 않고 꾸미지도 않는 나를 본받으면 안 된다고 하실 때가 적잖이 있다.

내 다른 모습은 안보이시는 것 같다.


지금 나의 위치는 밥 해주는 엄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가장 큰 역할로 자리매김하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다른 어른의 모습으로 살아보길 희망한다. 겉모습을 예쁘게 꾸미지 못해도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잘 꾸미고 싶다. 아이들이 내 삶의 근간은 맞지만 내 곁에만 두고 애지중지하는 삶은 싫다. 결혼 전에 엄하신 친정부모님을, 결혼해서는 자신과 자식을 분리하지 못하는 시부모님을 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딸과 며느리의 직함을 떼고 나대로 나 자체인 삶을 살아가려 한다.






작은 아이가 비빔국수가 먹고 싶다고 하여 국수를 만들다 보니 다시 시아버님 생각이 소환되었다. 국수를 보면 늘 그렇다. 4년 남짓 시댁에서 살았을 때 기억만 들춰도 이렇게 새록새록한데 남편은 시부모님과 30년을 살았고 결혼하고도 가까이서 지냈으니 그 기억이 오죽할까 싶다.


작은 아이는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기에 간장을 베이스로 한 비빔국수를 만들었다.

얼마 전 미역국을 끓이고 남은 양지가 좀 남아 있었다. 고기를 다져서 마늘, 맛술, 참치액젓, 간장으로 밑 양념을 했다. 소면이 아니라 약간 두꺼운 중면을 선택해 국수를 삶아내는 동안 고기를 볶아냈다.


국수 양념은 유자를 베이스로 만들 맛간장으로 만들었다. 집에는 세 종류의 맛간장이 있다. 레몬, 유자, 대추를 베이스로 만든 것이다. 맛간장은 기본 멸치육수에 양조간장을 섞고 마지막에 가쓰오부시를 우려낸다. 거름망에 걸러낸 후 설탕을 넣고 유자나 레몬, 대추를 끓여서 향을 입혀주면 된다. 국수를 비빌 때는 유자로 맛을 입힌 맛간장을 많이 사용한다.


맛간장에 설탕이 들어갔기 때문에 국수 양념에 설탕은 따로 넣지 않는다. 맛간장만으로만 맛을 내고 고명으로 얹은 고기로 잘 비비기만 해도 충분히 맛있다. 마지막에 참기름으로 마무리했다. 아삭한 오이를 좋아하여 국수와 겉돌지 않게 얇게 채쳐 올려주었다.


큰 아이는 밥을 먹었는데 국수를 먹어보더니 먹고 싶다 했다. 작은 아이와 달리 매운맛을 좋아한다. 고추장을 넣으면 간장 맛이 다 달아나니 고추기름으로 양념한 다짐 고기를 볶아냈다. 국수에 매운맛이 덧입혀져 기분 좋은 매콤함이 있었다. 고추장을 넣은 비빔국수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간장 맛은 지키면서 짐짐한 맛을 매운맛이 깔끔하게 날려주었다. 마지막에 식초를 아주 소량 넣어주었다. 자장면을 먹을 때 식초를 한수 푼 넣어주면 신맛은 없지만 자장면의 느끼한 맛이 잡히는데 그와 비슷한 원리다. 식초를 넣어주면 입에서 느껴지는 느끼한 맛이 어느 정도 중화되어 좀 더 깔끔한 맛을 낼 수 있다.

(음식 사진은 큰아이에게 만들어준 고추기름으로 맛을 낸 간장 비빔국수입니다.)


식구들 음식을 만들면서 세상의 진리라는 건 그리 복잡하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하찮게 파 한단 다듬다가 문득 깨닫기도 하고 아이들 웃는 모습을 보다가 알아지기도 한다. 책 속에 작은 글씨들의 의미가 커다란 파도처럼 덮치기도 한다.그런 깨달음들이 식구들 일로 속썩는 일들 안에서도 내 그릇이 작음도 알아간다. 


작은 아이는 오늘도 맛있는 음식 이야기로 일기장을 채웠다. 오늘 일기 노트 한 권을 다 채웠는데 내가 해준 음식 이야기가 반을 넘는다.  음식들이 단순한 추억거리로 회자되기보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대지위에 뿌리를 박으면서 끊임없이 위를 향해 뻗으려고 노력하는 삶을 위해 기억되는 음식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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