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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May 03. 2020

여유롭게 된장찌개

저녁이 되어가는 한산한 오후다. 오늘 저녁은 뭘 하지?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이기에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고 싶거나 재료가 마땅치 않은 날엔 아이들에게 오늘의 저녁 메뉴로 뭐가 좋을지 묻기도 한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애호박, 양파 같은 기본 채소들이 있고 다용도 서랍엔 며칠 전 사둔 햇감자가 한 무더기다. 스치는 메뉴 하나 ‘된장찌개’다.     



쌀 씻은 쌀은 물로 해도 그만이지만 냉장고엔 쓰다 남은 멸치육수가 있다. 멸치 육수를 냄비에 부어 된장을 적당량 푼다. 집에 5년 된장이 있는데 묵은 된장이 맛은 월등히 좋으나 진흙빛이라 시판 된장을 가볍게 섞어서 사용한다. 신혼 때는 요리 망에 된장을 걸러서 깨끗하게 하길 좋아했다. 솜씨가 없었던 터라 우선 비주얼이 우선시였다. 친정에서 먹던 걸쭉하고 묵직한 맛이 아닌 새댁이라는 이름답게 산뜻하고 가벼운 음식이 좋았던 것 같다. 지금은 예전 친정엄마처럼 거름망에 거르지 않고 콩된장 그대로 사용한다.      



육수에 된장을 풀고 재료 손질을 한다. 냉동실 한쪽 켠에 쓰다 남은 무도 있다. 생채나 김치 할 때 넣는 무는 생으로 사용하지만 찌개, 조림에 넣는 무는 얼려놓은 무로도 충분한 맛과 식감을 낼 수 있다. 오히려 생 무보다 살캉거리는 식감이 더 좋다. 얼면서 조직이 한번 파괴되어서 간도 쏙쏙 잘 베어 든다. 생무를 사용하다 자투리가 남으면 얼려두었다가 사용하면 그만이다.      


된장 푼 육수물이 끓는 동안 재료 손질을 한다. 이쁜 외형뿐 아니라 가격 또한 이뻐진 애호박, 구수한 맛을 더해줄 감자, 된장의 텁텁한 맛을 중화시킬 양파와 무까지 나박나박 썰어놓고 딱딱한 재료부터 순서대로 넣고 끓여준다.      





저녁 반찬을 만드는 동안 작은 아이가 소파에서 살짝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 같다. 이렇게 이쁠 수가 없다. 아이가 자는 동안 평상시 구석구석 보이지 않았던 것까지 보게 된다. 낮에 놀다가 긁힌 상처가 있다면 약도 발라주고 잠자리 추울까 해서 이불도 꺼내다 덮어준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정성은 좀 더 늦게 알게 되지 않았을까?  신혼 때처럼 이쁜 음식만 찾아다니고 일회적인 것에 더 길들여졌을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이쁜 구석이 보이는 것들은 스쳐 지나가듯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였을지 모른다.     



“저는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제트카를 타는 사람들은 풀이 어떻게 생겼는지,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모를 거예요. 왜냐면 그 차는 너무 빠르기 때문에 바깥의 풍경을 자세히 볼 수가 없거든요.”

소녀는 열심히 얘기를 계속했다.

“그 차를 타는 사람들은 녹색 얼룩을 보면 ‘아, 이건 풀이야.’ 그럴 거예요. ‘분홍색 얼굴? 그건 장미꽃 정원이지! 하얀 얼룩들은 거리에 늘어선 집들이고, 또 갈색 얼룩들은 소 때지, 아마?’     


<화씨 451>의 구절이다. 책을 불태우는 직업을 지닌 방화수 몬테그가 옆집에 사는 소녀 클라리세를 만나는 첫 장면이다. 누군가 잔잔한 내 삶에 돌을 던지지 않는 이상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살아간다. 책을 불태운다는 이상한 직업을 지닌 사람인데도 세상이 맞다고 긍정하면 그만이다. 부정하고 싶다 해도 말이다.      


우리의 삶 또한 너무 빠른 것만을 추구한 나머지 실물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지고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이 되는 듯하다.  진지하고 자세히 살피는 것은 희귀한 일처럼 여겨진 지 오래다. 오래전엔 TV가 사람들을 장악했고 지금은 그보다 더한 스마트 폰 네모 상자 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제 그 소중한 능력들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빠른 세상과 더불어 우리가 누리는 많은 문화 또한 변화되었다. 빠른 생활패턴에 맞춰 살다 보니 그것이 정형화된 것처럼 굳혀졌다. 말 대신 자동차가 일상화된 것이 불과 100년도 안되었는데 말이다. 컴퓨터나 스마트 폰이 보편화된 것도 최근의 일인데도 우리 삶은 원래 일시적이었고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 맞춰진 듯하다. 느린 것이 죄악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자세히 보는 것이 촌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최정상을 누리는 그들은 그런 느림과 촌스러움으로 우직하다. 그네들을 동경하지만 우리들은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아이의 이쁜 얼굴 보듯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식재료들을 닦고 썰어 소담스럽게 담아놓는다. 어떤 것들은 단단하고 어떤 것들은 무른 재료라 먼저 익히고 나중에 조리해야 순서들을 정할 수 있다. 손으로 만져지는 느낌, 칼로 썰어지는 느낌들이 손의 감각을 타고 전해진다. 재료들을 손질하면서 자세히 보아진다.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로만이 아닌 세세한 과정들이 전하는 선물 같은 것 말이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지 않았다면, 이 연약한 이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면 자세히 볼 수 있는 고귀한 능력은 묵혀질 수도 있었다. 인터넷의 떠도는 소식들처럼 대충, 그리고 많이 보는 것이 진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는 눈은 갈 곳을 잃어갔을지 모른다.     


보글보글 끊어진 재료가 주는 풍미와 구수한 된장이 한데 어우러진다. 친정 엄마가 챙겨 주신 달래 한 줌 송송 썰어 마지막 된장찌개의 휘날래를 장식한다. 익숙한 맛이 

눈으로 보이는 맛, 바글바글 끊어지는 익숙한 소리, 구수하고 향긋한 그래서 더 자극적인 냄새가 온 신경을 자극한다.     



묵직한 된장찌개 맛이 5월의 따사로운 햇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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