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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Oct 19. 2024

안녕, 자전거


 퇴원 후 몇 주나 지났다. 약도 잘 먹고 재활 운동도 열심히 했으니 이제는 괜찮겠지. 봄의 끝이라도 맛보고 싶어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잠시 달리다 깨달았다. 아직 아니구나. 작은 돌부리만 밟아도 뜨끔거리고 달릴수록 허리가 뻣뻣해진다. 여기서 그만두지 않으면 큰 일 나겠다 싶어 집으로 돌아왔다. 심각한 라이딩 금단 현상을 겪고 있지만 사실 나는 스물넷이 될 때까지 자전거를 탈 줄 몰랐다. 꼬맹이 때 어른용 무쇠 짐자전거를 타려다 실패한 이후로 도전조차 하지 않았다. 워낙 극악의 운동 신경을 갖고 있는 터라 잊고 살았다. 당시 일하던 레스토랑 주방장이 MTB를 갖고 있어 장난 삼아 타보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단숨에 나아가기 시작했으니 사랑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그녀가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자전거를 금방 배울 수 있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신비한가. 한동안 주방장에게 허락을 받아 밤마다 타고 다녔다. 밤바람을 맞으며 달리면 그날의 피로가 씻겨 나갔다. 


 그러고는 또 자전거를 잊고 바쁘게 살았다. 공무원 시험 준비. 진주로의 이사. 새로운 직장. 다른 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녀와 헤어진 다음 해.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아 운동을 시작했다. 막내고모 가족이 진주에 오셔서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순두부를 먹다 어떻게 자전거 이야기가 나온 걸까. 자전거를 타보면 어떠냐고 권하셨고 며칠 뒤 부산으로 가 고모부가 타던 자전거를 받아 왔다. 고모 댁에서 버스 터미널까지 타고 오는 것조차 위험천만, 자전거를 진주까지 가져오는 모든 과정이 아찔함의 연속이었다. 그날 이후로 매일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점심 장사를 마치면 남강으로 가 달렸고 마트에 갈 때도 자전거를 타고 갔다. 마음이 갑갑해지면 인적 드문 밤거리를 달렸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여행도 자전거와 함께였다. 진주에서 하동으로, 하동에서 광양으로, 광양에서 순천으로.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상주로, 구미로. 고작 몇십 킬로미터 사이에 그렇게 산이 많을 줄이야. 국토의 70%가 산지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지옥 같은 언덕을 헉헉거리며 오르고 또 오르면 몸도 마음도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내리막길에서는 바람이 된 것 같았다. 온몸으로 세상을 느꼈다. 대지의 열기를 가슴에 품었다. 두 다리로 존재를 지탱했다. 그저 발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아가고 있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디로 가도 길이 되는 거였다. 삶에 틀린 길은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이 세상이었고 우주였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달리는 순간 나는 살아있었다. 그즈음 제주도가 자전거인의 성지라는 말을 들었다. 이름마저 환상인 도로를 달려 보고 싶었다. 난생처음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가 1월이었다. 한라산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다음날에는 비가 내렸다. 대여점에서 자전거를 빌려 종주에 나섰다. 3박 4일 동안 나의 세상은 바람과 바다뿐이었다. 시린 무릎을 견디며 바람에 맞서 달렸다. 오전 내내 달리다 점심을 먹고 다시 달렸다. 해가 질 때쯤에는 숙소를 찾아 들어가 죽은 듯 잠이 들었다. 뼛속까지 파고든 바닷바람에 내 안에 박힌 가시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꿈꾸던 내일은 산산조각 났지만 아직 오늘이 남아 있었다. 두 발로 페달을 밟으면 나아가듯이 한 줄씩 진실한 문장을 이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 무릎은 예전 같지 않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도시에서 도시를 이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서글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때 그렇게 달렸으니 그걸로 된 거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비록 우리로 살아가는 내일은 사라졌지만 우리로 살아냈던 그때가 남았다. 그때는 영영 사라지지 않고 내 가슴속에 살아있을 터였다.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풍경으로 남아 생의 온기가 될 터였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할 테지만 앞으로 어떤 인연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를 만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남아있는 나날들을 사랑할 것이다. 글을 쓰다 답답해지면 자전거를 타고 나가 동네를 돌며 계절을 맛볼 것이다. 매화가 피고, 벚꽃이 지고, 동네 텃밭 한 구석 낮달맞이꽃이 피는 것을 지켜볼 것이다. 메꽃이 핀 해안가를 달리고 코스모스 손짓하는 가을을 달릴 것이다. 동백 핀 동네를 달리며 삶에 꽃피지 않은 순간은 없음을 되새길 것이다. 자전거와 함께 늙어갈 것이다. 한 줄기 바람처럼 살아갈 것이다. 나의 친구여 당분간 안녕. 하지만 영영 안녕은 아닐 테니까. 살아있는 한 스스로 바람 되어 달려가는 기쁨을 포기하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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