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 Oct 18. 2024

안녕, 통영


 제대 후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며칠이나마 쉰 것은 설 연휴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이미 채용 검진과 면접을 마친 상태였다. 간절히 복학하고 싶었다. 난생처음 학구열이라는 걸 느꼈다. 교직 이수를 하건 전과를 하건 나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싶었다. 밸런타인데이에 나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달콤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거대한 유조선 안으로 들어섰다. 살다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날은 비가 오고 있어 갑판은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작업 중인 사람들이 보였다. 이곳저곳에서 용접 불빛이 쏘아져 나왔다. 어떤 이는 망치질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크레인에 실린 짐을 부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용접 산소 호스 바로 옆에서 그라인더 질을 하고 있었다. 그라인더 불꽃이 산소 호스를 탐욕스럽게 핥고 있었다. 빗속에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전깃줄을 보며 든 생각은 두려움은 아니었다. 아, 이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싶어 생명 보험을 들었을 뿐이다. 너트를 조이고 사상을 치고 기름을 뿌렸다. 소장이 걷어차 준 덕분에 감전사를 면하고 그나마 젊었기에 추락사를 면했다. 족장 철거 작업이 진행 중인 곳에서 추락하려는 용접공을 붙잡아 구해 주기도 했다. 조장 형과 동시에 손을 뻗어 구한 뒤 셋이서 담배를 피우고 다시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하루 종일 공구를 끌어올리다 허리가 돌아가기도 했지만 접골원에서 뼈를 맞추고 다음날 일을 나갔다. 다른 곳이었다면 큰일이었을 일도 조선소 안에서는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보호 안경을 끼고 있어도 쇳가루가 눈에 박힌다. 그러면 이를 잡아주는 원숭이처럼 담배 곽 속 은박지를 뾰족하게 말아 긁어냈다.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아마 대학교를 졸업할 돈을 모을 때까지 다니지 않았을까. 하지만 2002년은 모두가 미쳐 있었고 나 역시 거리에 있었다. 한 번만 더 지각하거나 결근하면 끝장이라는 사장의 말 때문에 이탈리아 전은 얌전히 집에서 보고 있었으나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는 순간 택시를 잡아타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조선소를 그만두고 룸살롱에서 일을 시작했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던 내게 마담은 출근할 때 자존심은 집에 두고 오라고 했다. 기본급은 30만 원에 불과했지만 한 테이블에 팁이 몇 만 원씩은 되었다. 허리를 숙이고 미소를 짓는 값으로는 부족했지만 내일을 위해서라면 참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어느 날인가 종이 가방에 현금을 가득 채워와 테이블 위에 쏟은 손님도 있었다. 그가 한주먹 쥐어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준 지폐는 주유소에서 보름은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뺨을 맞기도 했고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인간의 역겨운 꼴을 모조리 보았다. 칼에 찔릴 뻔했던 적도 있었다. 더럽게 번 돈이기에 오히려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남은 안주를 주워 먹었다. 택시를 타는 대신 첫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돈을 아껴 집에 쌀을 사고 보일러 기름을 채우고 생활비를 드렸다. 차곡차곡 대학을 졸업할 돈을 모았다. 내 꿈의 값이었다. 그렇게 번 돈이 집의 빚을 갚는데 모두 들어간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이란. 학비를 대 달란 것도 아니고 생활비까지 주었는데. 아버지를 원망했다. 어머니가 미웠다. 지금에야 아들의 돈에 손을 댄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지만 그때의 나는 고작 스물둘이었을 뿐이니까. 얼굴을 맞대고 살 자신이 없었다. 통영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경기도 안산 갈빗집에서 야간 일을 시작했고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이게 웬일인가. 부지런한 너를 아들 삼고 싶다던 사장이 임금을 체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나 순진했다. 사장은 임금이 밀려 직원 모두가 그만두자 새로운 직원을 뽑아 장사를 계속했다. 노동청에 신고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노무사와 대면한 자리에서 그는 자신도 죽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가게도, 고급 자동차도, 일본에 있다는 땅도 모두 부인 명의로 되어 있었기에 끝내 한 푼도 받아내지 못했다. 가스가 끊긴 방에서 번데기 통조림과 소주를 먹으며 버텼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지만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었다. 어두운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가난하다고 왕따를 당하면서도 스케치북 하나 사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다들 가는 엑스포조차 가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일을 시작해 손을 벌리지 않으려 애썼다. 주유소만 해도 몇 군데를 다녔다. 조개 배달, 그릇 가게, 공사판, 노래방, 음식점, 민방위 대타까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많은 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그냥 내 손으로 돈을 벌어 밥을 먹고살고 싶을 뿐이었다. 고작 스물넷이었지만 삶에 지쳐 버렸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다. 이불을 적시던 붉은 피를 바라보며 안녕을 말했지만 마음은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친구의 신고로 119 구급대원들이 집에 닥쳐 들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손목에 붕대를 감는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구급대원 중 한 사람이 이러지 말라고, 이제는 괜찮다고 안아줄 때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패배자가 되어 통영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멍하니 지냈다. 좁은 부엌을 마주하고 한쪽 방에는 제초제를 마신 아버지가 한쪽 방에는 손목을 그은 아들이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날들이었다. 숨을 쉬는 것마저 힘겨운 날들이었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잠들어 깨어나지 않길 바란 밤들을 엄마는 어떻게 버텨낸 걸까. 엄마가 문 틈 사이 끼워둔 만 원짜리를 보며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싶었다. 다음날 새벽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인력 사무소에 나갔다. 어떤 날은 일이 있었지만 어떤 날은 일이 없었다. 일을 나가지 못 한 날은 모자를 눌러쓰고 걸어서 충무대교를 건넜다. 다들 갈 곳이 있었는데 나만 없었다. 다리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와 함께 작은 조선소에 일을 나간 적도 있었다. 아마 아버지도 다시 살아보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유람선 패드를 갈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튜브 속으로 들어가 나사를 풀고 조일 때 들리던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를 나는 기억한다. 그 뒤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썼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했고 땅 속으로 들어가 케이블을 끌었다. 그러다 미륵산 케이블카 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간이 일 년이 넘는 장기 공사였다. 트럭을 타고 올라가 내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베면 다른 인부들이 아래로 날랐다. 단순하고 손쉬운 일이었다. 점심이면 식사를 배달해 왔고 소풍 온 기분으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 일을 계속한다면 다시 뭔가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환경보호단체와 스님들의 데모로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동안 일한 돈은 먼저 달라고 했더니 인력소 여자는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 벼룩시장과 교차로. 구인란을 뒤져 일자리를 찾았다. 한 레스토랑에 직원 면접을 보러 갔고 다음날부터 일하기로 했다.   


 2004년 4월 15일 그날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아침 10시에 첫 출근을 해 일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왔다. 운명의 사랑이란 건 정말 존재하는 거였다. 첫눈에 이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노란 나이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반해 버렸다. 그때까지 나는 여자를 쉽게 생각했었다. 말만 잘하면 넘어오는 존재라 여겼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빛나는 사람을 이성으로 여기는 것은 죄악 같았다. 몇 달을 끙끙 알았다. 친구들은 나를 땡○이라 불렀다. 술자리든 어디든 만나면 땡 하고 그녀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자 봐봐. 이런 문자를 보냈는데 마음이 있는 걸까?’ ‘이런 선물을 받았는데 무슨 의미일까?’ ‘같이 밥을 먹기로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 물음표, 물음표. 그녀에 대한 궁금증으로 나의 세상이 가득 차 있었지만 손목의 붉은 흔적과 가난한 내 모습 때문에 고백하지 못했다. 오빠 동생 사이로도 지내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면서도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해 여름 달콤했던 첫 입맞춤까지는 그랬다. 


 그녀는 나를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약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을 마치면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김밥 한 줄, 붕어빵 한 봉지에도 행복해하는 사람이었다. 적금 통장을 만들어 주어 저축을 시작했다.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기쁨으로 가득한 오늘과 희망으로 채워진 내일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들이었다. 그녀가 재수 끝에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를 따라 진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진주에서의 날들. 비디오방에서 일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다. 한 끗 차이로 시험에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모두 일 년만 더하면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가게 매니저 일을 구했다. 공무원이 적성에 맞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이제는 그녀에게 좋은 것들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찾아간 가게에서 십삼 년을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을 약속했던 그가, 난생처음 부모님께 소개드렸던 그 사람이, 가난한 내 민낯을 보여준 단 한 사람이, 그런 민낯마저 사랑해 준 그녀와 헤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햇수로 구 년이었다. 아버지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친구는 매일 내 안부를 확인하려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어머님이 암에 걸리신 것도. 그녀의 어머님이 고된 시집살이에 교회를 다니신 것도, 내가 죽기 전에 교회에 한 번 나와 달라 한 것도, 어머니를 구해 달라며 울며 기도한 그녀도, 수술 결과가 좋아 기적이라 믿은 것도, 함께 교회를 다니자고 한 것도 잘못이 아니었다. 죄인이 있다면 너와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고 약속했으면서 교회조차 가주지 않은 나였다. 나를 혐오하고 원망하며 몇 년을 흘려보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도 일을 했다. 내게 주어진 상실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썼다. 나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글을 썼다. 새벽녘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자판을 두드렸다. 책을 두 권 내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6개월 동안 전국을 떠돌며 앞으로의 삶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 제주, 순천, 강릉 살고 싶은 도시는 많았으나 나는 결국 다시 통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2004년 상처투성이였던 그때의 나와는 달랐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오롯이 이해하고 있었다. 숱한 고난들도 내 생의 장면이 되었다. 어둠 속을 헤맬 때에도 삶은 빛나고 있었다. 아픔은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슬픔은 영혼을 성장시켜 주었다. 어디로 가든 나는 삶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하건 그것은 나만의 스토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두려울까. 나는 파도마저 고요한 바닷가 마을에서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통영은 바다의 이쪽과 저쪽이 가까워서 사람들은 풍랑에 갇히지 않는다. 새벽 조업을 떠난 이들도 저녁이면 돌아온다. 해도, 차도, 배도, 사람들도, 그리운 이름들도 충무대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간다. 달도 별도 바람과 파도마저도 통영이 그리워 돌아온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 한 아이들만이 등대처럼 우두커니 너른 세상을 꿈꾼다. 아무리 커다란 태풍이 와도 어촌 마을 어부는 무심히 배를 묶고 다음날 아이들은 뻘 묻은 마루를 닦고 가방을 멘다. 위쪽 사람들은 모르는 이도 많은 작은 동네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강인한 이들이 사는 곳이다. 오늘 나는  비로소 통영으로 돌아왔다.        

이전 09화 안녕, 미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