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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Oct 17. 2024

안녕, 미야


 서로에게 빛이었을 뿐 누구에게 빚을 진다는 말인가. 누가 사랑 앞에서 잘나고 못남을 따질까. 누가 사랑 뒤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까. 욕망에 몸을 던지던 스무 살의 우리를 기억한다. 그날의 열기는 몸 어딘가에 남아서 생을 이어갈 온기가 되었다. 전화기 사이로 전해지던 뜨거운 숨결, 달아오른 눈빛과 말들, 무수히 주고받은 편지들, 태종대에서 보낸 낮과 밤은 하도 돌려봤기에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예쁘게 꾸미느라 늦었던 너, 폐장 시간이 되어 너를 업고 내려오던 길. 너의 숨결에서 나던 레몬 냄새. 까만색 슬리브리스 원피스의 까슬까슬한 질감, 하얀 덧니와 분홍빛 잇몸을 드러내며 웃던 사람. 낡은 필름 카메라로 찍었던 청춘의 장면들. 사진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주고받은 편지는 태워버렸다. 보름 동안의 일병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는 날. 우리는 일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마산에서 통영으로, 통영에서 다시 마산으로 가는 번거로운 길을 택했다. 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무슨 음식을 시켰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 주고받은 말들은 한마디도 기억나지 않는다. 헤어짐이 서러워 철없이 투정을 부리던 나를 웃으며 달래주던 너의 표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버스가 뒤로 천천히 몸을 뺄 때 때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윤도현 밴드의 ‘너를 보내고’. 버스가 터미널을 돌아나갈 때 커다란 원형 기둥에 머리를 대고 있던 너, 참았던 울음을 그제야 쏟아내고 있었다. 몇 년 뒤 연락을 한 건 여름 햇살 아래 반짝이던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였을까. 너는 다시 연락할 줄 몰랐다고 말하면서도 나와 주었다. 약속 전날 역대 급이라던 태풍이 할퀴고 지나갔다. 진흙 범벅에 엉망이 된 거리를 아무리 걸어도 커피 가게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하필’ 그날이 아니었으면 달라졌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까지였던 거다. 우리는 헤어져야만 했던 거였다.


그때 지인 중에 내게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무례한 말인지도 몰랐다. 내게는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니까. 그 시절 너는 나를 비추는 빛이었으니 그저 헛소리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때 우리는 존 워커가 발명한 마찰 성냥 같았다. 눈길만 마주쳐도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숨결만 닿아도 저절로 서로에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만 닿아도 뜨겁게 달아오르던 날들. 우리는 어디에서나 불타올랐다. 너와 헤어진 후로도 누군가를 만났다. 그보다 깊은 사랑도, 지저분한 연애도, 오랜 사랑도 해보았지만 그때처럼 뜨겁게 타오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인생의 한 사람을 만나는 일과는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한 순간 뜨겁게 불타오르는 시기가 온다. 그때의 우리가 그러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서로를 원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간절한 이끌림이었다. 서로를 욕망하던 그 순간 우리는 누구보다 순수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아낌없이 불태워 서로를 욕망했다. 남김없이 마음을 내주었기에 이제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서로에게 준 불꽃은 각자의 몸 깊은 곳에 심어졌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겠지만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 너의 마음 어딘가에 그 시절이 반짝이던 순간으로 간직되어 있음을 안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은 청춘의 멜로디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온전히 자신을 불태웠다. 우리는 내일을 생각할 만큼 오래 만나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상대를 본능적으로 갈망했다. 우리는 변했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불태운 뒤의 변화이다. 순결한 재로 서로에게 이름을 새겼다. 서로에게 남긴 재는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며 투명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보석은 순간을 온전히 태운 연인의 가슴속에서 만들어진다. 메마른 입술과 무심한 눈빛으로 각자의 하루를 살더라도 가슴속의 빛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랑만 했으니. 그때 우리는 아름다웠다. 세상의 골목은 전부 입맞춤을 위한 곳이었고, 세상 모든 길은 손을 맞잡고 걷기 위해 존재했다. 서로를 바라보기 위해 해가 뜨고 서로를 그리워하기 위해 어둠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을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랑한다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순간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무언가를 잃어가며 삶을 얻는 거겠지. 이렇게 생은 익어가는 거겠지. 사는 동안 가끔 생각날 테지. 사랑했던 이름들은 사는 내내 살아갈 변명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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