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싸다 오래된 상자를 발견했다. 먼지 쌓인 상자 안에는 20세기가 들어 있었다. 넥스트의 앨범부터 대학 시절의 물건들. 군대에 있을 때 받았던 편지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먼지 냄새에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IMF가 터졌었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었기에 그리 나빠졌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수능 바로 다음날부터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했고 아버지는 배를 타러 나갔다. 선택 범위는 좁았다. 자취방을 구할 돈이 없으니 통학이 가능한 거리여야 했고 국립대여야만 했으며 국문학과가 아니면 갈 생각이 없었다. 통영에서 가까운 진주, 창원, 부산에 1번으로 원서를 넣었다. 경상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학과 오리엔테이션에 신입생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신입생은 여학우가 42명, 남학우가 9명이었다. 200명 남짓의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토록 많은 여자들 앞에 서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목소리가 갈라지고 다리가 떨리는 건 당연했다. 20년 남짓한 인생을 한반도의 역사에 빗대어 소개했다. 나름 당찬 인사였다고 자부하며 자리에 앉는데 유난히 흰 피부의 여자 동기가 눈에 띄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동그란 눈. 다가가 말을 걸었고 몇 시간 뒤 그녀와 나는 진주성의 벤치에 같이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 들은 바로는 선배들이 난리를 쳤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열심히 준비해 놨는데 신입생 둘이서 손잡고 나가 버렸으니 황당할 만도 하다. 훗날 동기 여자아이에게 들은 바로는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꽤 괜찮은 친구라고 호감을 가진 애들도 몇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뭐가 옳고 그른지 알 나이가 아니었다. 뭐 어쨌든 나쁜 짓을 저지른 건 아니었으니 대충 정리가 되었고 짧았지만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길거리에서 페트 소주와 스낵으로 술을 마시고 대학 강의실에서 술을 마시고 술을 사준다는 선배가 있으면 누구든지 따라가 마셨다. 시나브로 담배와 말보로 레드, 오마 샤리프를 피우고 다니며 마셨다. 그때의 나는 터프한 척을 하는 무례한 인간이었고 깊이 있는 척하는 가벼운 인간이었다. 사랑도, 사람도, 인생도 알지 못하면서 잘난 척하는 꼴 보기 싫은 인간이었다. 장기 자랑에서 교실 이데아를 부르고,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여자애들에게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를 들려주고, 정우성 휴대폰 광고를 흉내 내고, 수업에 들어가는 대신 잔디에 누워 담배를 피우던 그때의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걸까. 첫 학기가 끝나고 다음 학기 학비를 벌기 위해 이삿짐센터에서 일했다. 이삿짐을 나르다 피아노에 깔려 허리가 망가져 누워 있을 때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에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했다. 막상 올라가 보니 다단계였다. 두 번째 학기는 그리 재미없었다. 남자 동기들은 입대를 시작했고 여자 동기들은 끼리끼리 몰려다니고 있었으니까. 입대가 대학 가기보다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1년간 일을 하면서 입대통지서가 오기를 기다렸다.
1999년 12월 9일. 나는 창원 신병 교육대 앞에 서 있었다. 허리가 아작 난 상태였다. 제대로 걷지 못했고 앉을 수도 없었지만 남자라면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런 시절이었고 그런 인간이었다. 한의원에 가 침을 맞고 백반을 먹은 뒤 담배를 피웠다. 남은 담배를 친구에게 건네며 다음 휴가 때 피울 테니 잘 보관해 두라며 멋진 척 훈련소로 입소했다. 입소 첫날 그냥 MRI를 찍어볼 걸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며칠은 홀로 서서 점호를 받았지만 낯선 동기들과 친해지는 즐거움이 있었다. 제식훈련은 못했지만 포복은 끝내주게 잘했다. 화생방 훈련을 할 때는 누가 오래 버티나 내기까지 했다. 밤이면 전국에서 온 같은 내무반 녀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훈련이 힘들기는 했지만 함께 버티는 녀석들이 있어 견딜 만했다. 훈련소에 들어온 김에 담배를 끊기로 했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피워 온지라 이번이 기회라고 여겼고 생각보다 잘 참아내고 있었다. 교육을 받다가 작업에 뽑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필이면 우리가 입고 온 옷을 집으로 부치기 위해 소포를 싸는 작업이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들은 아들 옷을 붙잡고 그렇게 운다는데 그건 아들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묵묵히 우편물을 포장하고 있는데 작업을 감독하던 민간인 아저씨가 담배 한 갑을 던져 주었다. 군납 88이었다. 마치 그분이 하느님처럼 보였고 그분께 우리는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 “선생님 라이터는요?” 그날 피웠던 담배의 맛은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다. 그때부터 동기 몇 명과 함께 꽁초를 줍거나 조교의 담배를 몰래 훔쳐 피웠다. 담배 한 개비로 열 명이 나눠 피우는 기적이 그곳에 있었다.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다음 숨을 참는 게 요령이었다. 그렇게 몰래 담배를 몰래 피워가며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쐈다. 유격 훈련을 받고 행군을 했다. 1999년 12월 31일 Y2K로 미국과 러시아가 핵을 쏘지 않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다. 밀레니엄이 되던 해. 나는 스물이 되었다. 나의 십 대는 훈련소에서 저물었다.
저 너머에 남겨두고 온 것들이 있다. 책받침과 브로마이드. 엽서와 화보집. 홍콩 배우와 할리우드 스타들. 보물섬과 아이큐 점프. 이랜드와 브렌따노. 옴파로스와 브이네스. 그리고 리복. 갖지 못했던 것들과 가졌던 것들. 구제 금융 시대와 한 소년을 저 편에 남겨두고 왔다. 2000년을 기점으로 세상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도시 개발에서 자기 계발의 시대로. 삐삐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보들의 시대에서 사이코 패스의 시대로. 탐욕이 백화점을 무너뜨리고 부패가 다리를 끊던 20세기에서 무능이 배를 침몰시키고 바이러스가 창궐한 21세기로. 대학가요제의 시대에서 오디션 프로가 넘쳐나는 시대로. SBS 개국에서 SNS 라이브 방송의 시대로. 지역감정에서 젠더갈등으로. 차별을 넘어 혐오로. 물의를 일으켜 사죄하던 세상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려 하는 세상으로. 화합에서 소통의 시대로. 불협화음의 시대에서 단절의 시대로. 공중전화에서 카카오톡으로, 편지 대신 이모티콘으로 마음을 전하는 시대로. 정보 통제의 시대에서 정보 범람의 시대로. 자유를 위해 싸우던 시대에서 자존을 위해 싸우는 시대로. 사설의 시대에서 댓글의 시대로. 언론 장악에서 악플 규제의 시대로.
나이 앞자리가 두 번 바뀌는 동안 내 인생에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벌어놓은 학비를 날렸고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안산으로 올라가 일했다. 체불 임금 때문에 가스가 끊긴 방에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그마저 실패했다. 통영으로 돌아와 운명의 사랑을 만났다. 그를 따라 올라간 진주에서 15년을 살았고 그가 떠난 후에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스물의 나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아마 믿지 못하겠지. 그가 바라던 장소에 이르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지만 제법 다채로웠다. 열매를 맛본 적 없지만 그래도 생은 푸르렀다. 생의 중간, 밀레니엄을 경계로 나누어진 시간이 하나의 생을 이루는 것도 멋진 일이 아닐까. 생각한 대로 살지는 못했지만 상상도 못 한 곳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대단한 인간은 되지 못했지만 모두의 삶이 특별하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애틋했던 첫사랑도, 질풍노도의 소년도, 제멋대로였던 사춘기 시절도 여전히 저 너머에 있다. 그렇게나 뜨거운 여름이었던가. 그토록 오래된 이야기였나. 그때로부터 이렇게나 멀어졌는데 첫 입맞춤조차 흩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지만 맞잡은 두 손 사이에 머문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뜨겁게 사랑한 여름은 가고 다시 뜨겁게 살아낼 여름이 온다. 그때는 그대로 두고 새로운 날을 살아가야지. 사랑은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남겼고 청춘은 생을 붙잡는 노래가 되었다. 아무렇지 않아 진 다음에야 무언가가 되는 것들이 있다. 그때가 좋았다거나 지금이 낫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도 지금도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무엇이 좋고 어떤 게 나쁜지 따질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모두 나의 이야기인데. 세상은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적어도 살아 숨 쉬며 변화하고 있다. 나 역시 세월을 들여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되어 간다. 훈련소 동기들은 나처럼 아저씨가 되었을 테지. 여자 동기들은 아주머니가 되었겠지. 저마다의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겠지. 나이 먹은 게 뭐 어때서. 제자리에 머물 수 없는 건 아직 자라고 있기 때문인 것을. 그때의 내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추억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들이 그와 나의 이야기를 하나로 잇는다.
수업을 째고 과방에 앉아 있다가 처음 눈이 마주친 누나에게 술 한 잔 사 달라고 해서 아침 9시부터 막차 시간까지 쉬지 않고 막걸리를 마시던 날. 밀레니엄 첫 생일을 맞은 내게 훈련소 동기들이 마련해 준 파티. 그들은 배고픔을 참고 초코파이를 모아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고 주전자 속에 닭튀김을 넣어 왔다. 소리 없이 불러주던 축하 노래와 담배 한 개비에 눈물 흘렸던 밤이 내게는 최고의 생일이었다. 끝내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그 해의 봄은 미소로 남았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군복무였지만 그날의 따스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시간을 돌이킬 수 있어도 다시 살아낼 자신이 없다. 별 볼 일 없는 삶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최선이었다고 믿고 있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으로 하루를 살아볼 수 있다고 해도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재미없는 대답이겠지만 단 하루라도 오롯한 나로 살고 싶을 뿐이다. 나이를 먹는 만큼 나는 내가 되었으니까. 글쎄, 지금 내가 아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그런 사랑은 하지 못했겠지.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는 지워지겠지. 비로소 나는 나의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내 작은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아무리 커다란 세상이라도 소용없을 테니까. 지금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나와 같은 시절을 살아낸 그들의 안녕을 빌며 상자를 닫는다. 그때의 내게 안부를 전하며 민물장어의 꿈을 듣는다. 안녕 20세기. 안녕 스물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