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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Oct 14. 2024

안녕, 체력


 사채업자의 빚 독촉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하루만 무리해도 탈이 난다. 이틀 동안 조카들과 놀아주느라 약간 무리했더니 왼발이 삐걱거린다. 이제는 조금만 몸을 과소비하면 바로 빨간딱지가 붙는다. 젊을 때 방탕하게 몸을 쓰면 반드시 돌려받는다. 그렇지 않은 이는 이미 끝장난 사람뿐이리라. 젊을 때 밤샘은 기본이었다. 술을 마시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잠깐 눈만 붙여도 고된 노동을 감당할 수 있었다. 담배를 몇 갑씩 피워대도 숨이 차지 않았다. 농구를 몇 게임이나 뛰고도 체력이 남아 집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열두 시간 넘게 일을 하고도 게임방으로 달려갈 체력이 있었다. 물 대신 콜라를 마셔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겨울 제주를 달려도 버틸 만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한 시간만 덜 자도 하루 종일 골골거린다. 술 마실 때 2차, 3차까지 달리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 되었다. 담배 한 개비 피우기도 벅차다. 게임방에 가는 것 자체가 귀찮아졌다. 자전거를 다시 탈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함부로 쓰다가는 나이 들어 개고생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왜 흘려들었을까.

 

강아지를 체력으로 이기는 존재는 작은 인간뿐이라던가. 그럼에도 끊임없이 떠들고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는 조카들이 부럽지는 않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소주를 물처럼 돌이키던 스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이미 가졌던 청춘이니까. 비록 예전 같진 않지만 서럽지 않은 것은 덕분에 몸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귀하게 대하지 않으면 난리를 겪는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고장 났다고 갈아 끼울 수는 없으니 이 몸으로 남은 생을 버텨야 한다. 식단을 바꾸고 비타민과 유산균을 챙겨 먹는다. 외출할 때 선크림을 잊지 않고 힘들면 쉬어가는 법을 배운다. 몸이 아프면 곧바로 약을 챙겨 먹는다. 돌도 씹어 먹던 그때보다 물 한 모금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지금이 행복하다. 거침없이 달리던 그 시절에는 보지 못하던 풍경과 마주한다. 


 물론 몸이 아프면 세상이 좁아진다. 발톱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그러하지 않던가. 눈이 나빠져 멀리 보지 못하고 허리를 다쳐 침대 하나가 세상이 되기도 한다. 매사에 조심하고 꾸준히 관리해도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새어나가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살아갈 세상이 좁아지는 것이지 사랑할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느리게 걸어야 보이는 풍경이 있다. 오래 보아야 알게 되는 지혜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노화는 서글픈 일이지만 나이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깨달음이 있다. 이것은 말로는 전해질 수 없고 글로 써보아도 때가 이르기 전에는 헤아릴 수 없다. 살아갈 시간이 짧아진 만큼 나로 살아낸 날들이 쌓였다. 무언가를 잃어가지만 동시에 온전해지는 기분이 든다. 세상을 들여 내가 되는 이치를 배운다. 나이 듦은 어찌할 수 없는 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마음이 좁아지지 않도록 애쓰는 수밖에. 겸손을 배우고 배려를 익혀야지. 집착을 버리고 감사를 붙들어야지.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처음처럼 하늘을 보고 마지막인 듯 꽃을 만진다. 


 이제야 조카들에게 내가 갖고 있던 줄넘기를 선물로 줄 수 있겠다. 미련 때문에 차마 놓지 못했다. 한번 놓아버리면 두 번 다시 할 수 없게 될 것을 알기에 붙잡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음을 알겠다. 잘 가. 십 년 넘게 함께해 주어 고마웠다. 비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내 손을 놓지 않았었지.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고 새로운 계절을 살게 해 주어 고마웠다. 이번에 헤어지면 우리 다시 볼 일은 없으리라. 다시 만난다 해도 그때의 모습은 아니리라. 그렇지만 이제는 안녕을 말할 때다. 오랜 연인과 이별하는 기분이지만 서러워하지는 않으리라. 너와 함께 한 추억을 품고 살아가리라. 내게 삶을 변화시킬 힘이 있음을 가르쳐 주어 고마웠다. 제자리에 있어도 계절이 내게 밀려든다는 것을 보여주어 행복했다. 닳아진 자리에만 피는 꽃이 있음을 네 덕분에 알게 되었다. 조심스레 스쾃 자세를 잡아 본다. 아끼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아껴 쓰는 법을 배운다. 


 줄넘기는 자꾸 고장 나는 발 때문에 못하고 자전거는 허리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간 주제라 욕심내기 뭣하고. 십 년을 넘게 사귄 친구 중에 이제 철봉 하나가 남았다. 그래도 아직 철봉 하나가 남았다. 줄넘기와 팔 굽혀 펴기로 몸을 만들다 발을 다쳐 시작했던 턱걸이였다. 2개에서 3개, 3개에서 5개, 5개에서 10개, 물론 그때처럼 개수를 늘려가지는 못할 것이다. 운동장을 달리고 곧바로 턱걸이를 하는 런 - 업은 다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 500번 넘게 당긴 날이나 30킬로그램 가까이 되는 조카를 업고 당긴 날만이 절정은 아닐 것이다. 목을 매달고 싶은 유혹을 떨치려 안간힘을 쓰며 철봉에 매달렸던 모든 순간이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니 남은 동안에도 온 힘을 다해 철봉에 매달리고 몸을 당길 것이다. 철봉을 당기며 아직 내게 나를 감당할 힘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지나치게 솔직해진 몸뚱이를 어떻게든 구슬려가며 나아가는 수밖에. 조금만 무리해도 탈이 나지만 어쩌겠는가. 그 조금이 어느 정도인지 끊임없이 탐색하며 경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수밖에. 서러워할 시간에 돌봐줘야지. 밥을 지을 때 잡곡 한 줌 더 넣고 콜라 대신 탄산수를 마셔야지. 내일부터는 계단 오르기를 시작해야지. 할 수 없다며 포기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걸 한 다음 내려놓는 거다. 주저앉아 우는 것도 살기 위함이고 다시 일어나는 것도 살기 위함일 뿐이다. 적어도 이제는 아프면 아프다 말할 수 있다. 자주 아팠기에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배웠다. 끔찍한 고통을 겪어보았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결국 지나갈 것을 알고 이겨낼 것을 안다. 나는 오늘도 즐겁게 나이 든다. 사라지는 것들은 언제나 지혜를 남기고 간다. 그토록 많은 이별을 겪고도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는 말은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 사이에 삶이 서있다는 뜻이다. 제대로 안녕을 말한 후에야 지금을 껴안아 줄 수 있다. 겹벚꽃 지기 전에 한 번 더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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