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님씨는 1929년 목포에서 태어나 여덟 살 연상의 김동일 씨와 결혼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그 시절에는 당연했으리라.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한 결혼이었을까? 그곳에서 부산까지 오게 된 것은 6.25 전쟁 때문이었을까? 역사의 물결에 휩쓸리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동안 그녀에게 새겨졌을 상처를 어찌 알까. 그녀가 영광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짐 안에 아마 요강 하나가 있었으리라. 사고를 당해 걸음이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일을 다니며 육 남매를 길렀다. 한복집에 다니고 이불가게 일을 돕고 부역을 나가 아이들을 먹였다. 똥오줌조차 함부로 버릴 수 없었으리라. 그녀는 요강에 볼 일을 보았고 아이들의 똥오줌을 모아 텃밭에 거름으로 주었으리라. 79년, 첫째 아들을 시작으로 자식 다섯을 성혼시킨 다음 길 건너 집으로 이사했다. 갈매기 둥지처럼 절벽 위에 붙은 집이었다. 둘째 아들네가 집으로 들어와 지낼 때가 그녀의 봄날이었다. 보름달 같은 손자 웃음에 집안에는 늘 빛이 들었다.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니 남편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샘물을 뜨러 가고 밭을 가꾸고 옷을 꿰매고 바닥을 닦았다. 도대체 즐거운 일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초등학교 내내 여름방학이면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올라가 할머니 댁에 머물곤 했다. 그녀는 손자가 온다고 해서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텃밭에서 따온 채소와 된장이 전부였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던 아이가 무슨 반찬투정인가 싶겠지만 다들 할머니 댁에 가면 은근히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 아닌가. 씨암탉까진 아니어도 소시지나 햄이 올라오길 바랄 수 있지 않은가. 아마 요강을 들고 할머니를 따라가 텃밭에 거름을 준 날이었을 거다. 직접 똥물을 뿌린 채소를 먹고 싶은 아이가 있겠는가. 아버지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던 주제에 징징거리며 떼를 썼다. 우리 엄마는 맛있는 것만 해준다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던 그녀의 눈에 손자의 반찬 투정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하지만 열 살 남짓의 아이가 무엇을 알까. 할머니보다 막내고모가 보고 싶어서 부산에 갔다. 막내고모는 조카들을 데리고 남포동 시장에 가서 쫄면도 사주고 떡볶이도 배불리 먹게 해 주었다. 조카 군단을 모아 놓고 돈가스를 튀겨 주었다. 함께 배드민턴을 쳐주고 비디오를 빌려 보게 해 주었다. 할머니가 내게 해준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할머니는 몇 년 뒤 암에 걸려 부산 백병원에 입원했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아직 괜찮다는 의사의 말 때문에 임종을 지킨 것은 막내 딸 뿐이었다. 큰아버지의 아들이 유골함을 들고 내가 영정사진을 들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녀와의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숨 가쁜 시간들이었다. 사시사철 차고 맑은 물이 나오던 샘물은 흔적만 겨우 남았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관광지가 되었고 당신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세련된 카페가 생겼다. 관광객들은 핫 플레이스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며 사진을 찍어댄다. 내 유년기의 추억은 타인의 감성이 되어 버렸다.
문득 인사조차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가족 앨범을 열었다. 89년 여름 놀이동산에 데려다준 것도, 자유랜드 수영장에 데려다준 것도 당신이었다. 옷이 없어 초등학교 체육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행복해 보였다. 그래, 가끔 치마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주시기도 했었다. 대체로 박하사탕이거나 유가 맛 사탕이니 계피 사탕이니 하는 것들이었다. 형형 색깔 사탕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밋밋했지만 당신의 삶에서는 한없이 달콤한 천상의 맛이었으리라. 밥을 먹다 체하면 직접 담근 포도주를 마시게 하거나 손을 따주기도 했었다. 수학여행에서 사다준 부채와 수건을 소중히 간직했었다. 여름이면 당신과 다대포에 가곤 했었다. 손수 만든 나무 삽에 커다란 장우산까지 챙겨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면 백사장이 한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아무리 멀리 나가도 어린아이 가슴팍 높이밖에 되지 않는 평온한 바다였다. 나무 삽으로 뜨거운 모래를 퍼 덮어드리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누워 계셨다. 바다에서 놀다가 모래를 몇 번 갈아드리고 나면 어느새 점심이었다. 메뉴는 언제나 미역 수제비였다. 퍼질 대로 퍼져 국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은 수제비를 쉬어버린 김치와 함께 먹었다. 당신은 그때 시리도록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부디 그날의 풍경이 당신의 삶에서도 찬란한 날로 기억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나름대로 굴곡진 삶을 살았다지만 일본인들에게 핍박받고 6.25 전쟁을 겪은 당신의 삶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이제와 마음을 헤아려 보려 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당신의 이야기를 미치도록 듣고 싶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당신의 두 아들은 유골함에 담겨 같은 장소에 안치되었고 막내딸마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자식들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또 미워했으리라. 당신 역시 당신만의 방식으로 자식들을 키웠으리라. 어쩌면 당신이 내밀던 박하사탕은 내게 건넨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근현대사의 질곡 사이에 당신만의 밭을 일구었다. 요강 속 똥물로도 푸른 잎을 키우는 사람이었다. 젖을 먹이고 밥을 지어 아이들을 길렀다. 나 역시 당신의 밭에서 자란 아이 중 하나가 아닌가.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던 까닭이 무표정 안에 숨겨야 했던 감정이 너무 많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정한 표정을 짓기에는 당신에게 밀려드는 파도가 너무나 거칠었으리라. 고단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 종교에 기댔으리라. 당신이 어떤 종교를 믿었건 감히 판단할 수 있을까. 그저 당신의 버팀목이 되어준 무언가가 있어 다행이라 여길 뿐이다. 어느 날인가 왠지 일찍 깬 아침이 있었다. 당신은 불도 켜지 않은 채 햇살 아래 앉아 있었다.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고 성경을 읽던 당신의 등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나무 창문에는 당신이 키우던 몇 개의 화분이 햇살을 머금고 있었고 햇살 사이 춤추는 먼지는 천사의 날갯짓 같았다. 그날을 떠올리면 당신의 삶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박하사탕을 까 입 안에 넣었다. 위그든씨의 사탕 가게의 감초 과자처럼 꽤 오랫동안 그날의 풍경을 우물거릴 것이다. 지나고 난 후에야 알게 되는 슬픔과 사라지고 난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는 아픔을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호주머니에서 꺼내주던 박하사탕의 참맛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껍질이 눌어붙은 사탕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이었는지를 알겠다. 사탕 하나를 녹여 먹는 동안이라도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참 기쁠 텐데. 사람이 떠난 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토록 소망했던 구원의 장소에 당신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에게 비로소 늦은 인사를 건넨다. 미안했어요. 고마워요. 나의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