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라일락 담배를 몇 개비 연달아 피웠다.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서랍 속 통장처럼 집어넣은 뒤 남은 담배를 현진이에게 건넸다. 가게에 잠깐 뭐라도 사러 가는 것처럼 쿨한 척 창원에 위치한 신병교육대로 들어갔다. 허리가 아파 서서 점호를 받았지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의치 않고 훈련을 받다 보니 또 아무렇지 않아 졌다. 힘든 훈련을 함께하고 담배를 훔치고 밤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밀레니엄과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생일 소원으로 부디 너무 멀리만 가지 않게 되기를 기도했다. 조교가 500명 중 더럽게 운이 없는 몇 놈만 한강을 넘어간다고 했는데 그게 나였다. 특공대에 지원한 애들이 먼저 빠져나가고 전경으로 절반이 빠져나가고 부산이나 경남에 위치한 부대로 나머지가 빠져나갔다. 수료식을 마친 뒤라 PX도 갈 수 있고 담배도 피울 수 있었지만 불안하기만 했다. 서울은 수학여행 때나 가보았을까. 더플백을 메고 창원에서 동대구역으로, 동대구역에서 서울로. 불과 몇 시간 동안 통영에 살며 평생 본 것보다 많은 눈을 보았다. 인솔자들은 바깥은 쳐다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조는 새끼는 조져버린다고 윽박질렀다. 사단 본부에 도착해 며칠간 대기하는 동안에도 겁을 주는 인간들이 많았다. 군기가 빠졌다며 발로 걷어차려는 놈도 있었고 괜히 시비를 거는 놈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늑대 우리에 떨어진 새끼 새처럼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경기도 의정부의 산속에 내가 2년 동안 살 집이 있었다. 제설작업을 하는 병사들과 휑한 연병장. 낯선 건물들. 날 선 얼굴들. 모든 게 처음이지만 지겹도록 계속될 지옥의 나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나 많이 맞았던지. 일일이 말하기조차 귀찮을 정도다. 걸레를 돌돌 말아 내무반을 청소하는데 같은 면으로 두 번을 닦았다고 맞고, 서열 암기를 하지 못했다고 맞고, 군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고 맞고, 화장실에서 맞고 연병장에서 맞고 내무반에서 맞았다. 숨을 쉰다고 맞고 감기에 걸렸다고 맞고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맞았다. 뺨 맞고 차이고 두들겨 맞았다. 하도 맞다 보니 맞지 않고 잠들면 불안할 정도였다. 철모를 씌우고 개머리판으로 때릴 때에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는데? 어쩌려고 이러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본래 2중대 소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본부 중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건만 박쥐 취급이었다. 본부 중대로 갔다고 맞고 본부 중대로 왔다고 맞았다. 살아있음 자체가 세상에 해가 되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유독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선임이 하나 있었다. 동원과로 배속되었을 때 그가 그곳에 있었다. 수학여행지에서 파는 까만 콧수염 안경처럼 생긴 그 녀석은 나를 괴롭히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듯했다. 사무실에서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게 했고 내무반으로 돌아오면 벽만 보게 했다. 후임들조차 텔레비전을 보며 쉴 때 나는 관물대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취침 시간에는 뒤로 대가리 박기를 시켰는데 혹시 간부가 발견했을 때 자는 척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외곽 초소근무는 꼭 함께 나가도록 인사과에 손을 써두었다. 방한화를 신고 부대원들이 ‘눈물 고개’라 부르던 근무지로 향했다. 기어가고 굴러가고 맞으며 넘었다. 갈굼을 당하거나 기합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몇 대 깔끔하게 맞고 끝나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시대였다. 그런 분위기였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일상인 장소였다. 우습게도 인간은 어떤 상황에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그 시절 나를 구해주는 건 사랑하는 이들이 보낸 편지와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레몬차, 그리고 공중전화였다. 근무를 서러 가는 길 그의 뒷모습을 보면 차라리 얘를 죽여 버리고 나도 죽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건빵 주머니에 넣어둔 어머니의 편지를 움켜쥐고 참아냈다. 조금만 더 버티자.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내 생에 가장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가장 좁은 공간을 소유했었던 그곳에서 공중전화는 세상과 연결된 포털 같았다. 선임이 공중전화로 데려가 첫 통화를 시켜주던 날. 엄마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여기 참 좋다고. 선임들도 잘해주고 밥도 잘 나온다고. 이등병이 PX에 혼자 가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몸살에 걸려 배식을 남겼다고 취사병이 식판으로 찍어 버리고 짬이 흐르는 배수로에 머리를 박게 하는 시절이었다. 몸에 멍이 들지 않은 날이 없던 시기였다. 하지만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나를 속이고 사람들을 속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옥 같은 시기를 지날 때 전화카드는 바깥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티켓이었다. 저 너머에 나의 삶이 있다. 이 시기를 버텨내고 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저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 거 아닌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이곳에 내가 있다고,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사무치게 그립다고 외쳐야만 했다. 가끔은 살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무수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 동기들에게, 친구들에게, 누이에게, 엄마에게, 아버지에게. 그때 1541 콜렉트콜을 받아준 사람들이 나의 구명정이었다. 공중전화는 폭풍 치는 바다에서 겨우 붙잡은 뗏목이었다. 새벽 초소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불을 밝힌 공중전화 부스가 마치 등대처럼 보였다.
그때가 공중전화의 절정이었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집전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전 한 움큼을 쥐고 공중전화로 달려가던 밤도, 편지 안에 전화 카드를 넣어 보내주던 연인도, 수첩에 적어두었던 번호들과 이름들도 세월의 저 편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병사들도 부대 안에서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요즘 군대가 군대냐고. 너무 편해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답한다. 왜 그들이 고통받아야 하냐고. 왜 젊은 그들이 힘겨운 상황에 있어야 하냐고. 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을 희생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제공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우리가 그들에게 보낼 것은 감사와 존중뿐이라고 말이다. 지금쯤 병사들은 점심을 먹고 연인에게, 가족에게, 친구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힘들다고, 조만간 휴가 나가면 만나자고 이야기할 것이다. 수화기 사이로 주고받은 온기로 하루를 버텨낼 것이다. 경기도 의정부의 부대 안 공중전화 옆 개나리 덤불은 그대로 남아있을까. 백일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김밥을 사 먹었던 분식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눈물 고개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여전히 아름다울까. 어쩌면 아직 그곳에는 라일락 꽃잎 보며 한숨짓는 누군가가 수화기를 들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