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봤자 쓸모없는 신변잡기적인 잡문 7
18번에 관한 단상
이별 노래만 주구장창 듣던 때가 있었다. 오랜 연인과 헤어지고 슬픈 노래에 몸을 담그고 있던 시절이 길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볼륨을 키우고 이어폰을 꽂은 채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던 날들이 있었다. 그 시절 나와 함께 울어준 노래들이 있었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사진을 보다가> <이 나이 먹도록> <listen> <멀어지다> <기억을 걷는 시간> 넬과, 다비치, 바이브, 포맨의 노래로 채운 계절들이 있었다.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을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술을 마셔도 쉽사리 취하지 못했다. 아마 그 무렵이리라. 더 이상 노래를 부르게 되지 않은 것이.
비록 음치였지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노래는 못했지만 노래방은 싫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가요 톱 10에 나오는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길거리에서 팔던 짝퉁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가사를 적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썼었다. 나는 음정이나 박자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미각 없이 태어나는 사람이 있듯이 음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도 있는 법이다. 얼마나 박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음악 선생님들은 나를 공공의 적을 대하듯 했다. 당신들이야 모르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열심히 부르면 제대로 못 한다고 때리고 방해될까 봐 입만 뻥긋거렸더니 안 부른다고 때렸다. 어차피 맞을 거 반항이라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해도 맞고 하지 않아도 맞는다면 이왕이면 쪽팔릴 일이라도 없는 편이 낫지 않은가. 음치라도 노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훈련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는 법이다. 현진이네 노래방에서 몇 시간씩이고 연습을 했지만 실력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부를 노래 한 곡쯤은 있어야 사회생활이 되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멋진 18번을 갖고 싶었지만 댄스도 발라드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원진의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를 얼마나 연습했던가. 하지만 여자 앞에서 멋지게 발라드를 부르는 순간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손성훈의 <내가 선택한 길>이 18번이었다. 썩 나쁘지 않은 목소리와 성량만이 나의 무기였으니까. 대학교 때는 <교실 이데아>를 불렀다. 노래는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며 드렁큰 타이거와 다이나믹 듀오, 리쌍과 MC 스나이퍼의 랩을 연습하던 날들이 있었다. 가게를 운영하던 동안에는 알바생들과 락휴나 팝준코에 가서 자주 놀았다. 처음에는 카라의 <허니>라던가 소녀시대의 <GEE> 춤을 추며 같이 놀았지만 결국엔 발라드 타임이 오기 마련.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이 어찌나 멋져 보이는지. 촉촉한 눈빛을 주고받는 아이들 사이에서 꿋꿋이 김기하의 <나만의 방식>을 부르던 날들이 있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이별 노래만 듣던 어느 날. 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던 그때, 영화 <비긴 어게인>을 만났다. 댄이 그레타에게 모든 순간이 보석이었다고 말하는 순간 예전과는 다른 성분의 눈물이 흘렀다. 그래 모든 순간이 보석이었다. 반짝이는 순간들이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이별 노래와 헤어졌다.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새로운 옷을 입었다. 운동을 시작했고 글을 썼다. 비록 슬픔은 가시지 않았지만 더 이상 이별 노래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음악 애플리케이션을 깔아 새로운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이나래의 노래를 들었고 연정과 향니의 노래를 들었다. 아이돌 노래를 들으며 줄넘기를 하고 자전거를 탔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비록 그녀에게 청혼가를 불러주지 못한 채 사랑은 끝나버렸지만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누군가에게 노래를 불러줄 일은 없겠지만 세상은 날 위한 노래로 가득하다. 무사히 아침에 깨어 새로운 노래로 영혼을 적시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헛된 욕심>을 버리고 <밤하늘의 저 별처럼> 살아가리라. <별빛 같던 우리 낭만들>을 가슴에 품고서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가리라. <새로운 길>을 향해 두려움 없이 발걸음을 내밀리라. <삐뚤빼뚤> 해도 좋다. <아직은 낭만>을 꿈꾸고 싶으니까. 여전히 노래 따위 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새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기쁨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바람소리와 파도소리에 몸을 맡길 줄 알게 되었으니까. 고요에 영혼을 담그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몸짓으로 삶을 노래하는 법이니까. 가슴을 울리는 노래들을 들으며 발걸음을 이어갈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할 때까지 노래를 계속할 것이다. 사랑도 청춘도 내 곁을 떠났지만 나는 아직 삶의 한가운데에 있다. 내 18 번들은 옛날 노래가 되었지만 나는 매일 새로운 세상을 산다. 사람과 사람이 엉키며 한 음이 되고, 꿈과 현실이 부딪쳐 한 음이 되는, 발걸음마다 북소리가 되고 울음이 이어져 바다가 되는 세계를 여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