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쓸신잡

읽어봤자 쓸모없는 신변잡기적인 잡문 8

by 김민

사춘기에 관한 단상


엄마는 토요일 저녁이면 불후의 명곡을 보신다. 오늘 신해철 10주기 특집이라며 부르셨다. 바보처럼 눈물이 펑펑 흐른다. 라젠카 세이브 어스가 원래 슬픈 노래였던가. 아버지가 떠난 후 이렇게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소년이었던 그의 아들이 청년이 될 동안, 그렇게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저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있다. 나의 사춘기도, 청춘도, 20세기도 그와 함께 저물었건만 나는 그를 보낸 적이 없었나 보다. 나의 마왕, 시들지 않는 꽃을 피우고 간 당신, 이제는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겠지. 그래, 나의 사춘기는 마왕과 함께였다. 그의 모든 앨범을 사고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었다. 그의 말씀은 복음이었고 그의 앨범이 경전이었다. <the being>에 수록된 노래를 들으며 철학했고 <the wolrd>를 들으며 사유했다. 넥스트가 ‘해산’한 빈자리를 메운 것이 자우림과 크라잉 넛. 친구 방에서 뒹굴다 들었던 <Hey, Hey, Hey> 김윤아의 시원한 목소리와 상큼한 미소에 반해 버렸다. ‘도대체 저 여자 누구냐?’는 질문은 ‘도대체 이 미친 노래는 뭐야!’로 이어졌다. 핑크빛 명랑 밴드인 줄 알았건만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이라니. 이런 곳에 와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낙화>와 <파애>, <안녕, 미미>와 <새>를 들으며 세기말을 지났다. 청춘의 서막은 크라잉 넛이었다. <서커스 매직 유랑단>과 함께 <다 죽자>를 부르며 뛰어다니던 뜨거운 밤이 있었다. <양귀비> 대신 술과 담배에 취한 여름이 있었다. 그 시절 컴백이란 말은 <음반>이란 상차림을 가져온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들고 온 음악을 온전히 씹고 뜯고 맛보았다. 앨범 재킷부터 보너스 트랙까지. 그때의 앨범들은 한 권의 책 같았다. 달랑 싱글 하나 발표한 뒤 사라져 버리지 않았다.


나의 사춘기는 농구와 함께였다. 점심시간이면 두 개뿐인 농구 골대에서 몇 개인지도 모를 게임이 동시에 펼쳐졌다. 수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섞여 있었지만 기가 막히게 자기네 공을 찾아냈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면 가로등 불빛을 조명 삼아 뛰어다녔다. 운동신경은 별로였지만 농구는 제법 괜찮았다. 조리를 신고도 길거리 농구 골대를 잡을 정도의 점프력이 있었다. 시카고 불스로 치면 데니스 로드맨의 포지션이었다. 시대가 나를 바스켓맨으로 이끌었다. 슬램덩크 만화책을 돌려 보고 NBA경기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감탄했다. 여자애들이 우지원이 서로 자기 오빠라며 다투는 동안 외면당한 남자애들은 길거리 농구 코트에서 즉흥적으로 내기 농구를 했다. 가슴속 뜨거운 응어리는 오직 땀으로만 식힐 수 있었다. 게임이 끝나면 새우깡 한 봉지에 소주 대병을 종이컵에 따라 마시며 밤을 새웠다.

나의 사춘기는 이외수와 함께였다. 그의 책을 읽으며 성장했다. 키가 자라는 만큼 마음도 자랐다. 자아의 성장은 세계의 확장이었다. <장수하늘소>로 시작된 그와의 인연은 <꿈꾸는 식물> <들개> <벽오금학도> <자객열전>으로 이어졌다.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풀꽃 술잔 나비>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수필과 시집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를 향한 흔들림은 <감성사전>에서 정점을 찍었고 <완전변태>로 끝을 맺었다. 그의 책은 지독한 첫사랑 같았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힘없고, 남루하고, 가난하고, 비틀려 있고, 세상에서 밀려난 인물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세상에 상처 입지 않은 사람은 없음을 알려 주었다.

나의 사춘기는 첫사랑과 함께였다. 내게 프리지아 꽃다발을 준 그녀가 공식적인 첫사랑이지만 내게 닿았던 모든 사랑이 처음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돈을 세듯이 사랑을 헤아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도남동 등대에서 술을 마시다 처음 입을 맞췄던 소녀도, 진남초등학교 육교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여고생도, 함께 해저터널을 걸었던 여자도. 내게 편지를 보낸 모든 이들이 첫사랑이었고 밤새 적은 이름들이 첫사랑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사랑이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꿈이었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피어난 꽃이었고 다시 오지 않을 계절들이었다.

마왕은 어이없이 세상을 떠났고 김윤아는 치과 의사와 결혼했다. 그 시절 소녀들의 오빠는 아저씨가 되어 코트를 떠났고 이외수는 흐린 세상 건너 저 편으로 떠났다. 아마 나의 첫사랑 들은 누군가의 아내,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떠나도 이야기는 남는다. 가수는 떠나도 노래는 남는다. 청춘은 추억을 남기고 갔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검색’해야만 할 정도로 많은 장면들이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직 나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한 봄이고 꿈을 꾸는 한 푸름이니까. 청춘이라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 사춘기다. 나의 사춘기는 마흔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민물장어의 꿈>을 틀고 볼륨을 한껏 높인다. 아마 나는 그처럼 불후의 명곡을 남기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어떤가. 오늘도 나로 인해 썼다는 사람이 있고 내가 쓴 글을 읽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 가슴에 핀 꽃을 보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삶에 깃든 빛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스물의 내가 막연히 바랐던 꿈을 다시 쓴다. <낭만 사전>에 단어 하나를 추가한다. 물론 꿈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끝내 홀로 늙어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모든 순간은 봄일 것이다. 그러니 매일 아침 ‘오늘 나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읽쓸신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