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봤자 쓸모없는 신변잡기적인 잡문 10
문방구에 관한 단상
문방구에서 첫째 조카는 마이 멜로디 캐릭터 인형을 고른다. 둘째 조카는 포켓몬 캐릭터 카드와 딱지를 산다. 요즘 문구점에는 미미 인형 대신 시크릿 주주 굿즈를 판다. 거울과 화장품은 있지만 불량식품은 팔지 않는다. 초등학교 사 학년인 첫째 조카는 한 달에 오천 원을 받고 이 학년인 둘째 조카는 이천 원을 받는다. 1990년대 초반 누이와 나는 하루 용돈 삼백 원을 받았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일주일에 이천 백 원을 받았으니 우리가 돈을 더 받았고 물가를 따지면 엄청난 차이인 것 같지만 누이와 나는 정말 그걸로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지금 조카들 집에는 먹을거리가 가득한 데다가 때가 되면 간식에 특식까지 해주지만, 누이와 나는 삼시세끼 외에는 삼백 원으로 해결해야 했다. 조카들은 세뱃돈을 받으면 저축하거나 자기 필요한 것도 사는 모양이지만 우리들이 받았던 세뱃돈은 고스란히 엄마지갑으로 들어가 쌀을 사고 부식을 싸는데 쓰였으니 가끔 종합과자 세트를 선물 받으면 얼마나 기뻤던지. 물론 양갱은 엄마 몫이었고 몇몇 과자는 아버지의 안주가 되었지만 사랑방 캔디만은 우리 거였다.
늘 배가 고팠다. 당시 우리 집에는 그야말로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꽃을 따먹거나 칡을 캐서 먹고 빼때기로 만들기 위해 말리고 있는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 그도 모자라면 미숫가루를 타 먹거나 프리마를 끓여 마셨다. 그때 갱엿이 오십 원이었고 문어 다리가 백 원이었다. 배가 많이 고프면 백 원짜리 참라면을 사서 부셔 먹었다. 참라면은 끓여 먹으면 별로였지만 부셔 먹기에는 최적화된 라면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뿌셔뿌셔를 만든다니 노하우라는 게 확실히 있긴 하나보다. 학교 문방구 앞 50원짜리 뽑기가 있었지만 대체로 꼴등인 땅콩 캐러멜이었다. 승차권이 50원이었는데 걸어가는 대신 여름에는 길거리 아이스크림콘을, 겨울에는 번데기와 쥐포를 사 먹었다. 당시 우리에게 이천백 원은 큰돈이었지만 간식 몇 번 사 먹으면 끝이었다. 그래서 누이와 나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공병을 주웠다. 그때 맥주병은 이십 원, 소주병과 음료수 병은 십 원을 주었는데 그걸 모아 간식을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배를 채우고 나면 공터로 나가 놀았다. 공터로 나가면 언제나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 놀이가 어찌나 많았는지 모른다. 땅따먹기 게임을 하고 구슬치기를 했다. 자치기를 하고 딱지치기를 했다. 딱지는 동그란 딱지와 네모난 딱지가 있었다. 네모난 딱지는 종이를 접으면 그만이었지만 동그란 딱지는 돈을 주고 사야만 했다. 동그란 딱지에는 만화가 그려져 있고 숫자나 별이 있었는데. 별 많기. 사람 많기. 숫자 높기. 글자 많기로 겨루거나 손바닥으로 내리치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넘겨 따먹는 식이었다. 이상하게 운이 좋았던 날이 있었다. 하는 족족 이겼다. 옆집 형제를 무찌르고 윗집 아이를 꺾었다. 딱지 왕이었던 통장 집 아들을 무릎 꿇릴 무렵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구경을 했다. 까만색 비닐봉지마다 딱지가 가득했다. 세상의 왕이 된 기분이었다. 장롱 안에 가득한 딱지면 세상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주식이 그러하듯 치고 빠질 때를 알아야 했는데 승리에 취해 버렸다. 누이가 아이 중 하나에게 딱지를 한 움큼 빌려 주도록 내버려 두었고 또 도전에 응해주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승부를 하는 족족 지기 시작했고 저녁 무렵 내 손에는 단 한 장의 딱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화가 나 누이를 때렸고 아버지가 매를 들 때까지 울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나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무언가를 빌려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빌려 줄 물건 따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요즘 애완돌이 유행한다는데 나 역시 나만의 돌이 있었다. 비석치기용이었다. 매끈하게 잘 빠진 돌을 던져 넘어뜨리며 놀았다. 처음에는 출발선에서 그냥 던진다. 다음에는 돌을 먼저 던지고 깨금발로 뛰어 한쪽 발로 밟은 다음 그 자세에서 던진다. 발등에 돌을 얹어 떨어뜨리지 않고 걸어간 다음 발로 돌을 던져 넘어뜨리고, 양쪽 발 사이에 돌을 끼운 다음 깡충깡충 뛰어가 점프하면서 던져 넘어뜨리고, 무릎에 끼운 채 똥 마려운 사람처럼 걸어가 넘어뜨렸다. 배꼽 위에 올려놓고 하늘을 보며 달려가 넘기거나 목 위에 돌을 얹고 가 떨어뜨려 넘겼다. 신문팔이라고 겨드랑이 사이에 돌을 끼우고 달려가 넘기는 순서도 있었고 떡장수라고 머리에 비석을 얹고 걸어가 인사하듯 맞혀 넘기는 순서도 있었다. 호떡을 쥔 것처럼 앗 뜨거 앗 뜨거 하면서 손을 옮겨가며 뛰어가 넘기기도 했다. 진놀이와 구슬치기도 자주 했다. 동네 아이들이 편을 나눠. 전봇대를 각자의 진지로 삼는다. 한 명당 십 점을 갖고 시작해. 가위 바위 보에서 이기면 십 점 추가. 자기보다 점수 낮은 아이를 터치하면 이십 점 추가. 전봇대를 터치하면 삼십 점이었다. 구슬치기는 삼각형을 그린 다음 구슬을 모아 놓은 뒤 멀리서 구슬을 튕겨 바깥으로 빠져나온 구슬을 따먹는 게임이 주류였다. 북두칠성이라고 구멍 일곱 개를 파고 구슬을 튕겨 구멍 안으로 옮겨 가며 한 바퀴를 돌고 온 아이가 다 가지는 게임도 자주 했다. 눈치기라고 발치에 구슬을 올려놓고 맞추면 이기는 게임도 있었다. 비 오는 날에는 공기놀이를 하거나 (우리 동네에서는 살구라고 불렀다.) 문방구에서 천오백 원주고 산 부루마불을 했다. 다른 보드 게임도 몇 개 갖고 있었지만 억만장자 게임은 밸런스가 엉망이었고 땡팔이 봉급 탔걸랑요. 는 너무 빨리 끝났다. 종이가 닳아 너덜너덜해진 씨앗은행 돈이 선풍기 바람에 날아갈 때마다 여동생과 나는 언젠가 부자가 되면 최고급 부루마불을 사자고 다짐했다. 바람은 서른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우리는 지금도 종종 부루마불 게임을 하곤 한다.
바닷가 마을. 상습 침수 지역이었던 우리 동네 공터 한쪽에는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 대신 생활하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꼬랑탕이 있었다. 누군가 샤워라도 하면 샴푸 거품이 떠다니는 곳이었다. 우리는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줍는 대신 병을 깨면서 놀고, 불을 피워 부탄가스 캔이나 병을 던져 터뜨리며 놀았다. 연탄재를 발로 차 깨뜨리며 놀았다. 우유팩에 연탄재를 넣고 총싸움을 하며 놀았다.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양식장용 스티로폼을 타고 섬으로 헤엄쳐 간 뒤 그곳에서 게를 잡아먹었다. 소독차를 따라 동네를 뛰어다녔다. 정월이면 깡통에 구멍을 뚫어 쥐불놀이를 하며 아랫동네 윗동네 나눠 싸움을 벌였다. 안전 따윈 개나 줘 버린 시대였다. 쓰레기장은 우리의 보물섬이었다. 철저히 방목된 아이들은 언제나 손과 무릎이 터있었다. 콧물을 질질 흘리며 엄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곤 했었다.
오락실이 생기면서 공터는 버려졌다. 공터로 나가도 아이들은 없었다. 파마머리에 수염을 기른 주인이 오락실 셔터를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오락 한 판에 오십 원이었다. 누이와 함께 스노우 브라더스나 버블버블을 했다. 내가 컴퓨터 전원을 껐다가 켜면 누이가 조이스틱을 요리 저리 움직이고 버튼을 탁탁 눌렀다. 그러면 신발 아이템과 사탕 아이템을 먹은 상태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 일종의 치트키였던 셈이다. 오락실에 가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동안에도, 교실에서 지우개나 볼펜 따먹기 게임을 하고 짤짤이와 홀짝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자라고 있었다. 턱밑에 몇 가닥 수염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사춘기를 맞이했고 문방구는 팬시점으로 진화했다. 마침내 시내에 CNA라는 팬시점이 생겼다. 그곳은 언제나 형광등 불빛으로 휘황찬란했다. 여자아이들은 그곳에서 곱창 밴드나 쌍꺼풀 테이프를 사고 남자아이들은 그녀들에게 줄 인형이나 머리핀을 샀다. 도난방지를 위한 감시 카메라와 검색대가 있었던 그곳은 문방구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고 우리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세기를 지나 이곳으로 왔다. 더 이상 문방구에서 성질 더러운 할아버지나 느릿느릿한 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괜히 서글퍼진다.
커다란 변신 로봇을 가진 친구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아버지가 사주지 못했던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엄마에게 신청해 달라고 말조차 꺼내지 않았던 우유 급식에 얼마나 서러웠던가. 실내화가 없어 이따금 발을 찌르던 나무가시는 가난의 촉감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절마저 그립다. 그야말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던 시대였지만 온 세상이 장난감이었다. 온 동네가 놀이터였다. 분명 그때보다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건만 왜 이렇게 그리운 걸까. 나이 어린 동생도, 놀이를 못하는 나 같은 아이도 이편꼬다리(깍두기)가 되어 모두 함께 놀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동네에 바보 한 명씩은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이미 누렸던 것이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촌스럽지만 사람 냄새났던 시대가, 가난했지만 어디에 있어도 이슬처럼 반짝이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디즈니 만화동산으로 아침을 열고, 따끈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목욕탕에서 대야를 겹쳐 물장구를 치던 어린 시절의 일요일이 사무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