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봤자 쓸모없는 신변잡기적인 잡문 11
조카라는 존재에 대한 단상
이번에도 조카들은 색종이를 남기고 갔다. 첫째 조카는 보고만 있어도 어지러울 만큼 작은 종이로 학을 접어 휴대폰 케이스 사이에 끼우고 갔다. 둘째도 지기 싫은지 어떤 색으로 미니카를 접어줄지 묻는다. 조카들이 접어준 색종이를 상자에 넣는다. 사랑한다고 쓰인 색종이가 한가득이다. 그들은 내 삶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첫째 조카가 태어난 것은 오랜 연인과 헤어진 다음 해였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때였다. 출산 예정일에 맞춰 경기도로 올라갔다.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조카와 처음 만났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어머니는 누가 보면 네가 아빠인 줄 알겠다며 농담을 건넸다. 조카의 눈을 보며 맹세했었다. 너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적어도 삼촌은 왜 죽었냐는 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답을 하게 할 순 없었다. 운동을 시작했고 상담을 받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누이는 이 년 뒤에 귀여운 남자아이를 낳았다.
조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삶은 경이로웠다. 조카들이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살고 싶어졌다. 계산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고 조심스러워야만 하는 모든 관계들 사이에 사랑만 주면 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어두웠던 삶의 빛이었고 흑백의 세상을 채색하는 물감이었다. 조카들의 손을 잡고 걸었던 모든 길이 눈부셨다. 내게 엉겨 붙는 생명의 온기였다. 삼촌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늘 한 게임만 몇 가지인지. 로보 77, 달무티 카드 게임, 숨바꼭질, 윷놀이, 스플렌더 게임까지 했구나. 스무고개에 끝말잇기, 3.6.9 게임까지. 잠깐 숨 좀 돌리려고 화장실로 도망치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해줘도 끝이 없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조카들과 함께 있으면 체력이 쭉쭉 빠졌지만 그래도 따뜻한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조카들과 놀아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카들 덕분에 유년에 가져본 적 없는 추억을 체험할 수 있는 거지. 나는 갖지 못했던 유년기를 조카들에게 주고 싶었다. 함께한 순간들이 몸속 어딘가에 남아서 삶이 흔들릴 때 버팀목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조카들에게 사랑을 주는 만큼 내 안에도 빛이 차올랐다. 삐뚤빼뚤 쓴 사랑 한단 쪽지들이 나의 보물이 되었다. 가족 그림에 나를 끼워 주었고 언제나 자기들 옆에 앉아주기를 소망했다. 이따금 건네는 하리보 젤리는 내게 아직 맛보지 못한 달콤함이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날의 노을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는 황금빛 노을. 재잘거리며 뛰어다니는 조카들 옆으로 이따금씩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슬그머니 내 옆에 앉는 조카들을 보며 지금의 풍경이 사는 내내 나를 비출 빛이 될 것을 느꼈다.
이제 조카들도 제법 많이 컸다. 나이 드는 것이 즐겁지 않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한 배에서 나왔는데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다. 까칠하고 유난스럽지만 정이 많은 첫째와 밝고 무난하지만 공감을 잘 못하는 둘째. 서로 다른 너희지만 부디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란다. 말로 가르칠 수 없음을 알기에 몸으로 보여주려 한다. 사랑만 주면 충분했던 존재였던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사랑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나이가 되었지만 그러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 아니던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함부로 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근사한 일이 아니던가.
일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조카에게 삼촌은 뭐 하는 사람인지 물은 적이 있다. 너는 글 쓰는 사람이라 답했다. 그럼 ‘너희는 뭐 하는 사람이야.’ 장난 삼아 물었더니 한참 고민하던 너희들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유치원 다니는 사람? 물음표로 답했다. 그때 너희들에게 주었던 마음을 기억해 주렴. 너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다. 너희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세 가지뿐이다. 길을 건널 때 주위를 살필 것.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아끼지 않을 것.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잊지 않을 것. 그게 가르치고 싶은 전부다. 무엇을 배우고 느끼고 사랑할지는 너희들의 선택이니까. 세 가지만 너희의 마음에 새길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 언젠가 세상이 그리 공평하지 않으며, 위험이 곳곳에 악어처럼 도사리고 있으며 때로 지독한 일이 일어나는 게 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도 버틸 힘이 되리라 믿는다. 언젠가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날 테지만 내가 떠난 후에도 너희들이 여전히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을 생각하면 왠지 안심이 된다. 너희들의 따스한 말이 나를 살렸듯이 내가 남긴 글이 너희에게 빛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쓴다.
너희에게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누리길 바란다. 좋은 생각이 나지 않거나 나쁜 마음에 흔들릴 때는 바깥으로 나가 걸어 보렴. 입으로 들어오는 것 중에 생명 아닌 것이 없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렴.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세 마디 말만은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되렴. 사람에 집착하지 말고 사랑에 집중하렴. 감사를 잃지 않으면 모든 걸 가진 것이고 부끄러움을 잊지 않으면 모든 걸 아는 것이란다. 늘 감사하고 항상 겸손해야 한단다. 욕심을 버려야 기쁨이 차오르고 아픔을 삼켜야 추억이 깃든단다. 부디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렴. 지금 이곳이 꽃이란다. 부디 오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렴. 마음껏 꿈꾸고, 아낌없이 사랑하고, 흔들리고 아파하며 멋진 여행을 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