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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ㄷㅏㄹ Sep 24. 2022

소년 패션에 눈을 뜨다

1번 트랙

소년 패션에 눈을 뜨다


때는 바야흐로 2002년 3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하나로 응집했던, 역사적인 ‘2002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에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 즐겨 본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 서태웅과 동갑이 되었다는 사실에 소름 돋아하면서도 곧 성인이 된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내심 기분은 좋았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모두 같은 동네에서 졸업한 것과는 달리 고등학교는 지하철을 타고 10여 정거장을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들 대부분은 중학교 졸업 후 동네 근처에 위치한 인문계 고등학교로 입학을 했지만, 당시 나는 베스트 프렌드 ‘한’과 집에서 약 20km나 떨어진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께는 나의 애매한 성적으로 인문계 공부 벌레들의 들러리를 하느니 차라리 실업계에서 기술을 배우겠다고 말씀드렸지만, 16살의 나는 사실상 미래에 대한 꿈도 포부도 없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 마냥 휘청거리며 살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있어서 지하철에 몸을 싣고 10개의 정거장을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이슈였다. 16년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어미 품을 떠나지 못 한 아기 새처럼 동네 밖을 벗어나 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 과연 내가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품은 채 나는 입학을 하게 되었다. 허나, 친구 ‘한’의 존재 덕분에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새로운 환경에 안정적으로 안착하게 되었다. 한은 낯을 가리고 소심한 나와는 달리 나름 강단 있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고등학교 3년 내내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하였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소심한 면모 또한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복 바지 밑단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었다.


친구 한은 중학교 재학 당시 교복에 변형을 주지 않았다. 온전하게 가봉된 기성 제품을 용모 단정히 입고 다녔다. 반면 나는 바지 밑단을 6.5인치로 줄여 입고 다녔었다. 불량스러운 이미지를 풍기고 싶었다기보다는 바지의 통이 아래로 향할수록 좁아지는 승마 바지 핏이 그때는 왜 그리도 예뻐 보였는지 모르겠다. 결국 한과 나는 각자 생각한 대로 실행에 옮겼고, 우리 둘은 중학생의 나와 같은 바지 핏을 뽐내며 당당하게 고등학교 교문에 들어섰다. 대망의 첫 등교, 설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잠깐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교문에서 선도 부장 선배에게 잡히고 말았다.


다짜고짜 나에게 얼차려를 부여한 후 담배를 꺼내 놓으라며 윽박을 지르기 시작하는데.. 당시 나는 비흡연자였고 정말 억울했다. 또한 대체 나는 어떠한 연유로 오늘 처음 보는 사내에게 얼차려를 받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형벌은 오리걸음이었고, 혹독한 코스를 완주한 후 나의 잘못을 선배에게 용기 내어 물어보았다. 선도부장 선배가 말하길, 나의 넥타이가 삐뚤어져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그리 큰 잘 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의 고등학교 신고식은 이토록 언짢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마 신입생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자 했던 선도부원의 치기 어린 행동이지 않았을까 싶다.


악몽과도 같았던 첫 등교날은 앞으로 시작될 나의 밝은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액땜이었을까? 이어진 학교 생활은 그저 평화롭고 즐겁기만 했다. 중학교 당시 애매했던 나의 성적은 실업계에서는 상위권에 속하는 백분율이었고, 시험 기간에 맞춰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원하는 것 이상의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새로 사귀게 된 반 친구들 역시 선하고 재미있는 학우들이 많아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내 복사 붙여 넣기 같았던 고등학교 생활에도 슬슬 지루함이 찾아왔고, 입학 당시 가졌던 목표에 대한 방향성을 잃은 나는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소속된 우리 반을 넘어, 같은 과 친구들을 하나, 둘 사귈 수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 온 친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근’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게 옷이란, 벗고 다닐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걸치고 다니는 천 쪼가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농구공을 던지는 것에만 푹 빠져 있었기에, 모든 포커스가 농구를 편하게 하는 것에만 최적화되어있었다. 당시 나를 대표하는 것은 짧은 반삭의 머리, 무채색의 시장 표 티셔츠와 나일론 재질의 추리닝 바지였다. 그 외 스타일이라는 것은 나에게 사치로 다가왔고 옷에는 일절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소풍날 내 생각에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내 친구 한의 같은 반 학우였던 ‘근’이라는 친구의 착장은 그야말로 뻑이 갈 정도로 멋졌다. 마치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근의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날 근의 코디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있다. 이마에 땀띠가 나지는 않을까 싶었던 앙고라 재질의 캉골 벙거지 모자와 무심하게 풀어헤친 폴로 티셔츠 단추 사이로 보이는 금 목걸이. 손목에는 롤렉스 보다 멋져 보였던 G-Shock과 당시 10대들의 필수품이었던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다소 너저분한 바지 밑단을 깔끔하게 잡아 줄 힙합의 상징 에어포스 원 올빽 미드는 그날 착장의 화룡점정이었다. ‘근’은 당시 10대 소년들의 유행을 거스른 채 홀로 묵묵히 본인만의 스타일을 고수한 것 같았다. 당시 유행은 부츠 컷 팬츠에 양털 점퍼 그리고 값비싼 명품 스니커즈였으니 말이다. 패션 문외한이었던 내 눈에도 당시 유행하던 패션들은 정말 최악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맘 속 작은 불씨가 나도 모르는 사이 점화되고 있었다.


“나도 옷을 잘 입고 싶다”


‘한’의 소개로 ‘근’과는 빠르게 유대감을 쌓을 수 있었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마치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이라도 하듯 수줍게 말을 건네었다.


‘나도 너처럼 옷을 잘 입고 싶은데, 나는 어떤 스타일로 입어야 할까?’


나의 생뚱맞은 질문에도 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자주 있었던 일인 것처럼 신속 명확하게 답해주었다.


‘너는 나랑 외모나 체형이 비슷하니깐 너도 나처럼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찰나의 순간 툭 하고 떨어진 그의 대답은 간결했고 시니컬했다. 그의 진심 어린 조언은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고마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덜컥 겁이 났다. 근의 패션은 내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힙합 패션’이었기 때문이다. 한 여름에도 비니를 쓰고 3XL 티셔츠에 36인치 통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정체성을 뒤바꿀만한 일대 사건이자 큰 용기였다. 하지만 내 눈에도 근의 힙합 패션은 너무나 멋져 보였고, 이미 교내에서 패셔니스타로 인정받고 있는 그였다. ‘그래 도전해보자. 옷에 관심이 많은 근의 눈이라면 정확할 거야’ 생 후 17년 만에 내 가슴속에는 패션에 대한 욕망이 스물스물 자라나게 되었다. 그렇게 방과 후 친구 한과 함께 쇼핑을 다니며 옷의 색깔 맞춤이나 디자인, 사이즈에 관련된 부분은 친구 근에게 쉴 틈 없이 문자를 보내 물어보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학교 축제 기간이 다가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 준비를 하며 거울로 마주한 나는, 제법 스타일 좋은 힙합퍼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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