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입고 싶은 날

by 세둥맘

바지를 입고 싶은 날이 있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다 귀찮을 때 바지가 입고 싶다. 바지를 입고 다리를 내 마음대로 휘이휘이 저으면서 계단도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가고 싶을 때가 있다. 뭔가 마음속이 꽉 막히고 사는 것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 때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바지가 입고 싶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평상시 치마나 원피스를 자주 입는다. 자주 입는 만큼 치마나 원피스는 옷장을 열면 바로 손에 닿는 곳에 옷걸이에 얌전하게 걸려있다. 바지를 입으려고 옷장을 열어보니 저 구석텡이에서 꼬깃꼬깃한 모습으로 구겨져있다. 꺼내어보니 군데군데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도저히 그냥 입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바쁜 아침시간이지만 다리미와 분무기를 꺼내어 바지와 어울리는 블라우스를 다려서 입고 출근했다. 세상 편하다. 저절로 갈지자로 팔자걸음을 걷게 된다. 이렇게 편한 걸 두고 내가 왜 여름 내내 원피스와 치마만 입고 다녔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이렇게 편한 바지를 여성이 입기 시작한 것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야회복으로 적당한 여성용 바지를 처음으로 만든 디자이너는 프랑스적인 우아함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코코 샤넬(Coco Chanel)이다. 1920년대 여성이 샤넬의 통 넓은 선원 바지(sailor pants)를 앞다퉈 입으면서 여성복 디자인에 남성복의 전통을 과감하게 가미하는 시대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여성이 공장 교대 근무에서 벗어나 남성이 하던 역할을 이제 막 떠맡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때부터 상류층 여성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일부러 중성적인 의상을 입고 외출했다.

19세기 중반 이후로 위건(Wigan) 탄광의 갱도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치마 밑에 바지를 입고 작업한 일은 있었지만 시내 중심가를 다니는 일반 여성이 바지를 입고도 기분 나쁜 시선을 받지 않게 된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실제로 프랑스 파리에는 자전거나 말을 탈 때를 제외하고는 여성의 바지 착용을 금지하는 법규가 (사실상 사문화되기는 했지만) 2011년까지도 폐지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출처: 아래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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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편해서 입는 바지였는데 이렇게 깊고 슬픈 역사가 있었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적인 대상이었던 예쁜 인형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전거도 타고 탄광에서 남자들과 함께 노동도 하면서 걸리적거리는 치마를 벗어버리고 바지를 입게 된 것이다. 바지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남녀차별의 구시대적 문화를 타파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었다. 여성이 바지를 다른 사람들의 나쁜 시선 없이 자유롭게 입은 지가 겨우 100년 밖에 되지 않다니! 바지가 바로 페미니스트의 상징이었다니!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고 자유가 그리운 날은 바지가 입고 싶었나 보다. 나의 무의식 속의 집단 무의식이 그 사실을 깨우쳐주었나 보다. 내일도 자유를 만끽하면서 바지를 입고 팔자걸음을 휘휘 걸어보아야겠다.


(출처: 위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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