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생존자 이야기
원격연수 중에 이나미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인상 깊은 강의 내용이 있었다.
쓰레기와 거름은 둘 다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버려지는 쓰레기가 될 수도, 아니면 다른 식물의 성장을 돕는 거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두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닥친 고통을 쓰레기로 대하는지 거름으로 대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서른일곱 살 때의 일이다. 2년마다 받는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데 의사가 이상하다면서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겁이 났다. 대학병원에 전화를 해 봤지만 모두 예약이 두세 달씩 밀린 상태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잘한다는 개인병원을 수소문해서 방문했다. 다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
"유방암입니다."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직 0기 예요. 0기. 이건 암도 아니에요!"
의사 선생님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막 설명을 하시는데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멍하게 앉아있다 나왔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유, 아직 이렇게 젊은데 몹쓸 병이 걸렸네!"
병원에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다 보면 아주머니들이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나는 허겁지겁 수술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초기에 발견해서 약도 먹지 않아도 되었고 다른 항암치료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무늬만 암환자였던 것이다.
유방암은 다른 암에 비해 치료도 잘 되고 치료법도 다양한 착한 암이지만 재발도 잘 되고 전이도 잘 되는 암이다. 우선 먹는 것을 모두 유기농으로 바꿨다. 그리고 생전 안 하던 운동을 시작했다. 요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림프절 마사지를 받았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수술한 병원으로 가서 정기검진을 받았다.
하지만 너무 젊어서 암에 걸렸던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공부도 하고 싶었고 승진도 하고 싶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면서 수술한 지 십 년이 지나니 슬슬 일 년에 한 번 가는 정기검진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번을 건너뛰었다. 이년만에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
"유방암은 재발이 잘 돼요. 일 년에 한 번씩 꼭 오셔야 합니다."
"....."
"결과가 안 좋네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수술한 반대쪽 가슴에 또 유방암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2기를 넘어 3기로 진행 중이었다. 처음 암이 걸렸을 때는 조기에 발견해서 항암치료도 안 받았다. 그래서 너무 암이란 녀석을 만만하게 보았나 보다. 이번에는 암이란 녀석에게 된통 걸렸다. 암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치러야 했다. 우선 수술! 수술 후 항암치료! 그것도 8차! 그리고 방사선 치료 34회! 치료 후 타목시펜 5년 복용!
수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항암치료는 너무 무서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시로 나오는 그 장면이 생각났다. 인터넷에서 항암치료에 대한 정보를 밤늦도록 검색했다. 유방암환우 인터넷 카페에도 가입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견뎠는지, 얼마나 힘든지 매일 검색했다. 두려웠다. 그것도 여덟 번이나 그 힘든 걸 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항암치료에 앞서 우선 항암치료약을 정맥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관을 삽입하는 수술을 먼저 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 부분마취를 한 뒤 수술을 했다. 수술하면서 의사들끼리 하는 농담이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부들부들 무서움에 떨고 있는데 의사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내 몸이 찢기워지고 바늘과 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소리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통증은 없이 말이다. 내가 프랑켄슈타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머리를 밀었다. 머리가 자고 일어나면 우수수 빠지는 것을 보면 더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미리 머리를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단발 가발을 사서 쓰고 다녔다. 단발 가발을 쓰고 회의에 참석했다.
"머리 너무 예쁘다. 요즘 왜 이렇게 예뻐지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말해주었더니 모두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첫 번째 항암치료! 항암주사실에서 삽입한 관을 통해 약을 다 맞는데만 4시간이 소요되었다. 항암주사 투약 후에는 특유의 메스꺼움과 구토를 방지하는 약을 30알 정도를 먹어야 했다. 하루에 3번씩! 약을 먹고 나면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구토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속은 계속 메스꺼웠고 온 몸이 퉁퉁 부었다. 발로 바닥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몰려왔다.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었다. 온몸을 그물거리면서 지나가는 기분 나쁜 통증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온몸에 털이란 털은 다 빠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얼굴에 있는 눈썹과 속눈썹까지 다 빠져버렸다. 펜슬을 사서 아이라인을 그리고 다녔다. 가발을 쓰고 아이라인으로 눈썹을 그리고 출근을 했다. 사람들이 가발이 잘 어울린다고 위로해줬지만 모두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6개월 동안 질병휴직을 했다. 당시에는 교육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질병휴직을 허락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인사과에 몇 번을 찾아가서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내가 최초의 질병 휴직자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달았다. 휴직을 하고 나머지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나마 직장을 나가지 않으니 살만했다. 암환자들을 위한 명상 프로그램도 나가고 우울증 치료도 받았다.
"참 의연해!"
과장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고통에도 굳은살이 박이나 보다. 너무 많은 고통을 겪다 보면 쓰나미처럼 닥쳐오는 고통에도 무덤덤해지는가 보다.
그래도 가장 힘든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다.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만 했다.
내가 하던 공부는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럼 뭐하지? 어떤 날은 주야장천 드라마를 봤다. 그리고 미뤄두었던 각종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합창, 성가대, 민화 그리기까지! 하루가 모자라게 바쁘게 뛰어다녔다.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이제 수술한 지 5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5년이 되면 나는 '유방암 생존자'가 된다. 생존자! 사전에서 찾아보니 '재난이나 멸망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라고 나온다. 나는 두 번의 유방암이라는 재난을 겪고도 살아남은 자가 되는 것이다. 죽지 않고! 왠지 생존자라는 말에는 그 상황에서 죽는 게 맞는데 죽지 않고 기어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죽지 않고 기어코 살아난 나는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도 거름이 되고 싶다. 나의 아팠던 고통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 싶지는 않다. 나처럼 아픈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 그들에게 유방암이라는 재난을 겪고도 이렇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좌절과 절망에 빠진 그들이 다시 일어나는데 작은 힘과 용기라도 주고 싶다. 그러려면 나의 악취 나는 고통을 내가 끌어안고 잘 발효시켜야 할 것이다. 오늘도 글쓰기와 사색을 통해서 나의 고통을 끌어안고 녹여내고 있다. 마치 어미 닭이 알을 품듯이 나의 고통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