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오래되고 낡은 집이다. 일층은 상가이고 이층은 살림집이 있는 건물이다. 이 집은 팔십 년생으로 지금 마흔넷이다. 이곳은 가족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누나들이 산달을 여기서 지냈다면 생로병사도 함께 했을 수도 있었다. 가족의 대부분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전의 집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아담한 집이었다. 그 시절은 물론 연탄으로 난방을 했었고 가끔씩 구들장의 틈새로 가스가 스며들어 아침에 머리가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난시청 지역이라 지붕 위에 안테나를 조절해 가며 티브이를 봤던 생각도 어렴풋하다.
그 헌 집에서 부모님은 새로 집을 짓는다고 설계도를 가져오셨다. 당시로서는 주변에 이층 집이 드물어서 동네에서 관심거리였다. 어머니는 이 집을 짓는데 무척이나 공을 들이셨다. 인부들을 위해 추운 겨울에 가끔씩 식사를 손수 마련하는 수고도 하셨다. 그렇게 겨우내 열심히 공사가 이루어지고 이듬해 봄 새집으로 이사했다. 그즈음 컬러티브이도 나와서 우리는 화려한 색상으로 광주에서 일어난 폭동을 선명히 보았다. 어린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아서 자랑하고 다니고 싶었다. 이 즐거움은 사오 년을 지나 내가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사그라들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이 집은 방학 때나 가끔 들르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가 구십 년대 이 집의 황금기가 왔다. 누나들이 결혼하고 조카들이 태어나고 집은 딸들. 사위들. 조카들로 명절 때면 항상 북적였고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군에서 전역한 날 김일성 주석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병인 당뇨가 악화하면서 밀레니엄을 보지 못하시고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이 집은 어머니의 집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건재하신 탓에 아버지의 슬픔을 잊고 다시금 행복해졌다. 하지만 이천 년대 초반 나의 낙향은 어머니에게 나름의 상처를 안겨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강하신 분이었다. 잘 이겨내셨다. 그리고 이 집은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간다. 고칠 곳이 많아 약간의 위기도 있었지만 그런대로 잘 치료가 되었다.
계속 건강하실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오육 년 전부터 경증치매를 앓고 계신다. 이후로도 어머니의 집은 한번 더 수선을 거친 후 지금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비가 많이 오면 가끔씩 빗물이 새기도 한다. 어머니는 이 집에 애착이 많다. 그래서인지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도 이 집의 주소만은 또렷이 말씀하신다. 어머니에게는 낯선 환경이 나쁘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당분간 이 집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