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인간의 식욕을 충족하고자 살육을 일삼는 꿈을 꾸고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영혜를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영혜의 남편은 영혜의 이런 행동을 참지 못하고 친정식구들에게 알린다. 이에 영혜의 아버지의 폭력적 행위는 영혜의 자해로 이어지고 영혜의 발병에 촉매가 된다.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형부는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영혜를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위해 이용하려 한다. 이러한 예술적 욕망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자극해 도덕적 일탈을 가져오고 사회적 파탄에 이르게 하고 영혜가 자살을 시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한다. 나무불꽃에서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음식을 거부하며 죽음을 갈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영혜의 이런 행동이 정신질환의 증상이지 의도된 행동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나무로 생각하는 무의식은 욕구 충족을 위한 폭력성에 대한 저항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폭력성이라는 관점에서 세 편의 글은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몽고반점에서 영혜가 형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에서 영혜는 성적 폭력의 피해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영혜는 일상속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제약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갈망을 표출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한다.
인간의 폭력성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식욕을 충족시키려고 인간은 살육을 멈추지 않고 있다.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가족제도를 만들었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에게 생명의 유지와 보존을 위한 근원이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는 문명을 등에 업고 거대한 확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근원적 욕구는 심화하고 변형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출현과 민주주의의 발전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 신장을 가져온 반면 소수에게만 허용되었던 문명의 향유를 보편화하고 있다. 절제되고 정제되지 않는 보편화한 인간의 욕구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하다.
솔직히 나도 연작소설에서 작가가 던지려는 메시지를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도 소설이 잘 이해가 가지 않더라는 친구의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물론 친구가 나와 같은 의도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