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절을 다니던 누나가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절에 다니던 누나의 쉽지 않은 결정과 변심을 보며 나도 신앙에 대해 다시 되짚어 보게 되었다.
나의 신앙생활의 시작은 대학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만난 친구와 가까이 지내다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친구와 같은 불교학생회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 이전에 학생운동의 막바지에 있던 이념 동아리와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줄 어학 동아리의 유혹을 뿌리쳐야 했다. 보통의 동아리생활이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자의 반 타의 반 착실히 정기법회에도 참석하고 사찰에서 하는 이박삼일의 수련회도 다녀왔었고 그곳에서는 불교신자라면 적어도 한 번씩은 행하는 삼천배도 했었다. 그리고 과 후배들도 몇 명 꾀어 나조차도 믿음과 확신을 갖지 않고 있었던 신앙과 동아리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하다 못해 황망하기까지 하다. 그나마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유대와 친밀감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군대를 다녀와서의 동아리 생활은 후배들의 신선함에 밀려 가끔씩 들르는 곳에 지나지 않다가 그마저 흐지부지 되었다.
학교를 떠난 이후로 나는 스스로 마음이 동해서 절을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믿음이 없었다. 불교에 대한 이해도 비불교도가 아는 정도에 그칠지도 모른다. 대학 초년생 때 교양 시간에 수강한 종교학개론 수준에 아직 머물러 있었다. 내가 동아리에서 접한 불교는 종교가 아닌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끈이었을 뿐이었다. 물론 불교를 통해 나의 대학생활은 외롭지 않았다.
지금 이제 나는 누나와 성당을 다녀보려 한다. 이 결정에 누나의 공이 크지만 가까운 친구의 권유도 한몫 거들었다. 관련된 책들도 몇 권 추천해서 읽어 보았다. 그중에는 종교학개론 시간에 사 두었던 찾아보니 아직 책장에 꽂혀 먼지가 쌓인 외국학자의 번역서도 있었다. 오십이 넘어 만학도가 되어 교리 공부를 해야 한다. 영화와 그림에서 본 창세기와 모세의 기적. 천지창조와 최후의 만찬.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믿고 따라야 한다. 아직도 믿기 어려운 그가 행한 기적과 부활도. 하지만 너무 무리하게 나를 다그치지는 않으려 한다. 내가 받아들이고 다가갈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하려 한다.
돌아보면 나는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신이 인간이 기대하는 선과 정의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 때 신에 대한 나의 믿음은 회의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기대는 어쩌면 인간의 잣대일 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이기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는지도.
작년 여름 무섭게 내리던 폭우와 겨울이면 닥치는 경험하지 못한 강추위가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