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직장인은 누적된 업무 피로감을 어떻게 풀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커피 한잔하면서 수다를 떨 수도 있고, 운동을 하며 땀으로 진한 스트레스를 배출할 수도 있다. 그밖에 일과 일상의 온도차를 줄이기 위해 소소하게 퇴근 후 할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혼술, 혼밥, 혼영…. 요새 혼자 하는 게 유행이라는데? 평소 혼자 얕고 넓게 배우기 좋아하는 이 과장이 퇴근 후 취미 탐색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 첫 시작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될 줄이야! 평범한 직장인의 특별한 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몇 년 전 유명연예인의 집이 방송에 나온 적이 있다. 으리으리했던 그의 집보다 오랜 시간 기억에 남았던 건 냉장고였다. 평소 평범함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내뿜던 그의 패션스타일이나 기행과는 다르게 열외를 허락치 않는 군인처럼 가지런히 세워진 냉장고 속 음료와 맥주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집에서도 가게 분위기를 내고 싶어 업소용 음료 냉장고를 집안에 설치해 놓은 그의 재미난 라이프 스타일은 자취생의 로망을 실현한 것 같아 부럽기까지 했다. 시원한 캔맥주가 가득한 냉장고는 자취생이나 직장인이라면 한번씩 꿈꿔보던 것이 아닐까? 퇴근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마셨을 때 그 짜릿함이란! 직장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주는 고마운 존재일 것이다. 술집에서 여럿이서 거하게 마시는 술도 좋지만, 집에서 무장해제하고 마시는 술 한잔의 매력은 두 번 말해야 입 아프다. 누구는 청승맞다 하겠지만 혼술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곳간 채워놓 듯 술을 사서 냉장고의 빈자리를 메워 놓으면 어쩜 그리 뿌듯한지... 풍류를 아는 직장인이랄까? 소소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워라밸’을 누리는 느낌이 들었다.
‘찐’ 건어물녀의 부활…수제막걸리의 로망을 실현하다
집에서 추리닝 바람에 맥주와 오징어 등 건어물을 즐겨 먹는 여성을 ‘건어물녀’라고 한다. 워낙 평소에 노가리며, 한치며 건어물 사랑이 유별나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힙스터의 성지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누벼왔지만 코로나19 덕분에 더욱 속세를 멀리하며 혼술을 진하게 즐기게 됐다. 덕분에 안주가 떨어지지 않게 냉동실에 건어물을 채우며 ‘찐’ 건어물녀로 진화를 거듭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에 작은 힘을 싣게 되었다고 자위해본다. 프로 혼술러는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값비싼 양주는 소확행에 부합하지 않으니 양주는 제외하기로 한다. 막걸리, 맥주, 소주, 와인 기분에 따라 그날 함께할 술을 결정하는데 아무래도 맥주가 1순위가 된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는 역시 막걸리가 당기기 마련. 퇴근 후 지하철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마주치는 파전집은 가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진한 기름 냄새를 머금은 축축한 공기를 맡으면 막걸리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아난다. 덕분에 맥주 다음으로 막걸리를 혼술 주종으로 많이 찾게 되는데 새로운 맛에 대한 도전 정신이 강해 처음 보는 브랜드나 제품이 있으면 꼭 마셔보려고 한다.
이쯤 되니 한번은 직접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몇 주간 지속된 방콕으로 몸도 근질근질해지니, 수제 막걸리에 대한 로망을 실현할 때가 도래한 것 같았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쉽게 술을 담글 수 있도록 막걸리 만들기 키트 제품이 많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중 제일 기본적이고, 패키지가 깔끔해 보이는 제품을 주문했다. 언제 어디서든 술이 익어가는 숙성 과정을 사랑으로 지켜봐 주고 싶었기 때문에 술은 회사에서 빚기로 했다. 술이 익은 후에는 회사에서 원데이 주막을 열어 대미를 장식하기로 계획을 짰다.
생각보다 간단했던 막걸리 빚기 (feat. 사랑 고백)
막걸리를 빚기 위한 준비물은 아주 간단하다. 밥, 누룩, 생수, 그리고 발효통이 다. 빚는 법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함께 동봉된 설명서가 나름 상세해서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설명서를 정독하고, 준비해본다. 요즘 같은 시기에 위생과 청결은 더욱 신경 써야 한다. 긴 머리는 똬리를 틀어 정갈하게 묶고 마스크를 썼다. 손 소독제도 발랐다. 그날 입은 황톳빛 카디건을 보곤 동료들은 술을 빚는 장인 같다고 했다. 완벽하다.
밥은 열기를 미리 식혀 놔야 하기 때문에 전날 미리 준비해왔다. 막걸리의 신맛을 줄이고, 감칠맛을 살리기 위해 찹쌀과 감초를 더했다. 개인적으로 고슬고슬하게 지은 고두밥을 좋아하나, 진밥으로 만든 술이 더욱 맛나다고 하니 설명서를 적극 따르도록 한다. 소독해 놓은 발효통에 식은 밥과 누룩 한 봉지, 시원한 생수를 넣어 잘 섞어준다. 짓이겨주는 느낌으로 누룩과 밥알이 잘 섞이게 정성을 다해 여러 번 저었다. 이 상태로 상온 18~22도에서 일주일 정도 잘 놔두면 된다. 엄청 간단하지 않은가! 방법이 간단할수록 쌀의 비율, 밥의 진정도 등 디테일한 부분들이 술맛을 좌우하겠지만 막걸리 빚기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니 적당히 하도록 한다. 이제부터는 정성이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막걸리에 모닝 인사를 하며 밤새 분리된 내용물과 물이 잘 섞이게 흔들어주는 의식을 진행한다. 술맛이 좋아지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나지막이 외쳐본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디데이, 원데이 주막 오픈
술 오픈 디데이는 일주일 뒤로 잡았다. 술에 안주가 빠지면 섭섭하다. 손이 많이 가지 않은 안주로 몇 가지만 준비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막걸리 ‘최애’ 안주 분홍색 소시지를 굽기로 했다. 부침가루를 묻혀 톡톡 털어낸 분홍 소시지에 계란물을 입혀 구운 후 새콤한 케첩을 뿌려주면 훌륭한 안주가 된다. 간혹 그 맛이 그리워 집에서 해먹을 요량으로 기다란 소시지를 사가면 엄마는 건강에 좋지도 않은 밀가루 덩어리가 뭣이 그리 맛있냐며 혀를 차신다. 계란물이 남으니 동그랑땡도 함께 부쳤다. 제사음식 준비하는 큰며느리가 된 기분이었다. 국물 요리도 빠질 수 없다. 원데이 주막 손님으로 초대된 동료의 남편이 마침 일식 전문 셰프라 노동력을 착취해 꼬치 오뎅탕도 완성했다. 원데이 주막을 위해서 도토리묵 장인인 어머니 노여사도 힘을 보탰다. 전날 묵을 직접 쑤어 주신 덕분에 탱실탱실 찰진 도토리묵을 맛볼 수 있었다. 삼삼하게 간이 된 묵은 양념장 없이 먹어도 입 안에 퍼지는 쌉쌀한 맛이 일품이었다.
담가 놓은 막걸리 양이 분명 모자랄 듯하니 술도 부족하지 않게 미리 주문했다. 자고로 고기와 술은 끊기면 안 된다고 했다. 온라인몰을 통해서 대학생 때 즐겨 마시던 옥수수 동동주를 주문했다. 주 5일 열과 성을 다해 고주망태가 됐던 그때 찾은 기가 막힌 조합이 있다. ‘옥동주와 파전 위에 골뱅이’라고 들어봤을까? 이 환상적인 조합은 애석하게도 대학교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구수하고 달큰한 옥동주를 한잔하고, 매콤한 골뱅이를 파전에 싸서 한입 먹으면 술이 술술 들어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주막 오픈 날 골뱅이를 맛깔나게 무쳐줄 금손, 국장님의 부재로 골뱅이의 큰 자리를 건어물의 황제 먹태로 대신했다. 옥동주와 파전 위 골뱅이는 기회가 된다면 꼭 맛보기를 추천한다.
막걸리 드디어 오픈하다
안주는 이만하면 되었다. 이제 술통을 오픈할 차례다. 사랑으로 일주일간 흔들어준 막걸리 통을 열었다. 냄새와 색깔이 제법 막걸리답다. 막걸리를 거르기 전 기대감을 품고 이 구역 막걸리 전문가인 총무팀 홍부장님을 초빙해 시음 후 막걸리 평을 부탁드렸다. 홍부장님이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리며 한마디 하셨다. ‘엄청 센데?’ 예상치 못한 부장님 반응에 순간 움찔했지만 다 같이 시음은 해야 하니 구멍이 촘촘한 샤주머니를 이용해 막걸리를 걸러본다. 한 방울이라도 떨어질세라 준비해 놓은 막걸리 공병에 조심조심 옮겨 담았다. 파티는 시작됐다. 노오란 양은 잔에 막걸리를 한 잔씩 따랐다. ‘위하여!’ 한 모금 호기롭게 마셔본다.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알코올 향이 너무 강하다. 혹시나 상처받을 나를 위해 숙성이 덜 되어서 그런 것 같다는 위로를 건네며 끝까지 마셔주려는 착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안되겠다며 제일 먼저 싱크대로 달려가 막걸리를 버렸다. 냉장고에 맛있는 막걸리가 한가득인데 맛없는 술로 배를 채울 필요는 없다. 이때다 하고 다들 싱크대로 달려가 술을 버렸다. 달큰하고 진한 맛의 막걸리를 기대했지만 대 실패였다. 첫술에 배부르겠냐만은 역시 밥은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고, 술은 파는 술이 최고다. 막걸리를 빚는다는 구실로 마련한 원데이 주막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갔다.
막걸리는 비록 실패했고, 특별한 안주도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소확행을 누리기 위한 막걸리 파티로는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일까 혼술도 좋지만 오랜만에 다 같이 정신없이 웃으며 마시는 시간이 즐거웠다. 곧 다 같이 마스크를 벗고, 코로나 종식을 축하하며 막걸리잔을 기울일 그날을 기대한다. 다음에는 어떤 취미 탐색을 해볼까? 자체 막걸리 시음회를 해보는 건 어떨까?
덧,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막걸리를 거를 때 샤주머니에 거른 내용물을 여러 번 치대서 막걸리를 진하게 우린 후에 물을 섞어 두 차례 더 숙성을 거쳐야 막걸리가 제대로 맛을 낸다고 한다. 비극적인 막걸리 맛은 막걸리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뒤쪽 설명서를 제대로 안 본 기자의 처참한 결과였다. 숙성이 덜 된 막걸리 원액을 그대로 마셨으니 맛이 없을 수밖에… 여기서 교훈! 설명서는 폼이 아니다. 꼼꼼히 보자.
데일리타임즈W 에디터 이예림 dtnews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