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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타임즈W Jun 18. 2020

[W렌즈 집콕의 세계④] "손님, 라면도 셀프인데요"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은 얼마나 슬기롭고 지혜롭게 집콕 생활을 영위하느냐에 달렸다. 의미 없이 TV 채널을 돌리며 심심해하는 것은 이제 그만. <데일리타임즈W> 기자들이 각자의 취향과 적성을 살려 집콕 취미 생활에 돌입했다. 홈 트레이닝으로 ‘확찐자’를 예방하는가 하면, 숨겨왔던 덕후력을 살려 만화책을 돌파하고, 추억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취미활동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도 마련했다. 미술관 대신 스마트폰에 나만의 아트 컬렉션을 만들고, 단골 술집의 안주를 집에서 재현한 홈바를 만드는가 하면, 잔부터 원두까지 오직 나만을 위해 셀렉션한 홈카페를 열었다. 사람이 너무 그리워 결국 집에서 홈파티를 벌인 기자까지 지루함을 즐거움으로 바꾼 생생한 후기를 읽다 보면, 어서 귀가해 자신과의 설레는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질 것이다.


곧 끝나겠지 했던 코로나19는 끈질겼다. 겨울의 끝 무렵부터 시작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 덕분에 집콕에 강제성이 더해지면서 피로감이 급격히 누적되기 시작했다. 봄바람이 따듯하게 일렁이며 답답함에 포화된 몸과 마음을 살살 약 올리는 것 같았다. 넉넉해진 시간을 온전히 즐길 집콕 아이템을 찾기로 했다. 학창 시절, 두 살 터울 남동생과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던 추억이 떠올랐다. 책만 보면 감기던 눈은 만화책을 볼 때만큼은 총기를 되찾곤 했다. 그래! 홈만화방으로 집콕을 즐겨보는 거야! 

만화책과 간식을 플렉스 해버렸지 뭐야


생에 처음으로 만화책을 소장하기로 했다. / 사진=이예림 기자

수많은 만화 중 이번 프로젝트와 함께할 만화를 고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대여점에서 책을 빌릴 수도 있었지만, 프로젝트를 핑계 삼아 처음으로 만화책을 구매해 소장하기로 했다. 소장 가치를 따지자니 학창 시절 내 눈물, 콧물을 다 빼놨던 타무라 유미의 <바사라(BASARA)>와 완결을 미처 보지 못하고 끝낸 바사라의 후속작 <세븐시즈(7Seeds)>라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총 52권 주문 완료,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방 한구석에 마련된 간식 코너. 손님 막 먹으면 살쪄요. / 사진= 이예림 기자

만화책으로 눈의 즐거움은 책임졌으니 입도 즐거워야 공평하지 않을까? 책을 읽다 보면 쉽게 허기지는 배와 심심한 입을 채워줄 주전부리 준비로 완벽한 홈 만화방을 완성하기로 했다. 퇴근길, 집 앞 마트로 달려갔다. 가출했다 돌아온 ‘썬 칩’, 애정하는 ‘포스틱’은 특별히 두 봉지, 프라이드치킨 맛이 난다는 신상 과자도 겟했다. 한 개씩 먹다 보면 어느새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마는 천하장사 소시지, 초등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가 연탄불에 구워 주셨던 고소한 쫀드기, 맥주 안주로 그만인 대왕 어포도 카트에 던져졌다. 대표 메뉴 라면도 한 팩 담아본다. 만화가 주인지, 먹을 게 주인지 어느새 이성을 잃고 사재기를 하는 나를 발견하곤 순간 움찔했지만, 순전히 내 취향으로 가득 찬 카트를 보고 있자니 ‘캬! 이 맛에 돈을 벌지!’란 허세가 올라온다. 

예림이네 24시 만화방 오픈


예림이네 홈 만화방 주말 이틀간만 운영합니다. / 사진= 이예림 기자

방 한구석에 플렉스한 간식들을 보고 있자니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 역시 곳간은 채워야 맛이다. 요즘은 룸이나 텐트로 공간을 분리해 편하게 누워서 만화책을 볼 수 있는 만화방이 많은데 기자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제대로 잉여가 되기로 했다. 새 만화책을 싸고 있던 비닐은 칼 선을 미리 내놓고 손만 뻗으면 바로 다음 편을 볼 수 있도록 침대 옆에 나란히 진열해 놓았다. 세팅 완료! 세상에서 가장 편한 복장으로 침대에 누워 세븐시즈 1권부터 집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비닐을 뜯고, 책을 펼쳤다. 비닐에 갇혀 있던 진한 인쇄 냄새가 툭 하고 터진다. 헌 만화책의 쿰쿰한 냄새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침대와 물아일체가 된 진정한 와상(臥像)으로 만화책을 대하기로 했다. / 사진= 이예림 기자

바사라와 세븐시즈는 모두 스케일이 큰 편이다. 특히 세븐시즈는 지구 종말 후 살아남은 인류의 생존기를 다룬 만화로, 만화 덕후 지인은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낼 수 있는 시의적절한 내용의 만화’라고 평했다. 바사라는 거의 20년도 전에 출간된 고전이지만 매력적인 그림체와 등장 캐릭터들은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전쟁과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운명의 아이로 태어난 쌍둥이 오빠 ‘타타라’가 적의 침략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오빠 대신 남장을 하고 진정한 운명의 아이가 되어 성장하는 여자 ‘사라사’의 이야기이다. 어디에나 극적인 요소는 빠질 수 없으니, 여 주인공은 가족과 마을을 몰살시킨 원수와 서로의 악연을 모른 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전쟁터에서 칼을 겨눈 채 서로가 원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눈물, 콧물을 쏙 빼며 감탄을 자아냈다. 

손님, 라면도 셀프랍니다


트러플 오일을 넣은 짜파게티와 맥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 사진= 이예림 기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꼬르륵’ 배가 긴급 타전을 했다. 홈만화방은 공짜인 대신 서비스는 무조건 셀프다. 만화방에서 빠질 수 없는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는데 대세를 따라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를 먹어야 하나 했지만 특별하게 ‘트러플 오일 짜파게티’에 도전하기로 했다. 때마침 작년 스페인 여행에서 득템한 트러플 오일과 페스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트러플 오일과 페스토를 취향껏 넣은 짜파게티에 계란 노른자로 화룡점정을 찍어준다. 배가 많이 고팠던지 짜파게티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뒤늦게 올라오는 느끼함을 눌러줄 시원한 맥주와 안주를 챙길 차례다. 어포와 쫀드기, 홈런볼에 버터를 살짝 넣어 에어프라이어로 돌리면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겉바속촉’의 환상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안주를 그릇에 담아 재빨리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 모서리에 버터기름이 묻어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빨맥 한 모금에 어포를 씹으며 책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무릉도원 같았다. 

홈만화방으로 집콕이 주는 즐거움을 배로 느끼다


만화책으로 둘러싸인 침대, 집콕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 사진= 이예림 기자

며칠을 아무것도 안 하고 만화책만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음 편이 궁금해서 중간에 끊지 못하다가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주말 내내 만화책에 둘러싸인 채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폐인화되어가는 딸을 보며 “쟤 온종일 뭐 하고 있는 거야?”라고 아빠는 물었다. 어렸을 때라면 등짝 스매싱이라도 한 대 맞았겠지만 “예림이 지금 일하고 있는 중이니깐 방해하면 안 돼요.”라고 문을 조용히 닫아주시던 엄마의 모습에 자본주의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업무상 합법적 잉여의 혜택을 한껏 누렸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즐긴 방구석 홈만화방은 대성공이었다. 무엇보다 아무런 목적도, 압박감도 없이 순간을 즐겼다는 점에 스스로 굉장히 만족했다. 무심코 보냈던 지난 일상이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보도는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지칠수록 흐트러지는 마음을 잡고, 재미있게 집콕을 즐기다 보면 코로나19와 안녕을 고하는 날이 곧 다가오지 않을까? 그때는 한강 텐트 만화방을 오픈해 봐야겠다.



데일리타임즈W 이예림 기자 dtnews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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