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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기 Jan 29. 2024

내가 모르는 워드 파일이 저장되어 있다

해킹 당한 거 아님

얼마 전 맥북을 샀고 난 오래된 LG그램을 정리하게 되었다. 중요할 것도 없는 노트북이라 내게 그나마라도 소중한 자료가 있다면 일기를 쓴 워드 파일들이 전부. 조금 더 설명하자면 투고하려고 모아두었던 에세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잘한 파일들을 아무리 정리하고 정리해도 반절이나 차지하고 있는 용량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루 종일 노트북 디렉터리를 뒤져보는 짓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덕에 나는 ‘편지’, ‘편지 2’라는 제목의 정체 모를 워드 파일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망설여졌다. 이 파일들, 열어도 되나? 내용이라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고. 제목에 힌트도 별로 없고. 내 노트북에 있는 건데 왜 무섭지? 어머니가 옆에 계셔서 나는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 파일이 과연 위험한지, 해로운지, 또는 충격적인지의 여부를 얼른 확인해 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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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결과 -



다행히도 그 워드 파일은 내가 오래전 좋아하던 친구에게 쓴 생일 축하 편지였다. 말레이시아에서 3개월 어학원을 다니던 시절 알게 된 일본인 친구에게. 아마도 6, 7년 전의 일이다. 난 그 친구에게 두 가지 버전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평상적인 내용이 담긴 친구로서의 생일 축하 편지, 다른 하나는 조금 더 깊은 내 마음을 담아 보내는 편지였다. 난 두 가지 버전을 편지지에 모두 옮겼고 그 친구에게 건네기 전에 둘 중에 하나 고르도록 했다. (영화도 아니고) 그 친구는 내가 건넨 두 개의 편지 중에 짧은 편지를 챙겨갔고, 그렇게 내 진짜 속마음은 전달되지 않겠구나 하며 이게 운명인가 하는 마음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 편지를 정독하고 나니, 그 친구에게 전해주고픈 마음이 일었다. SNS로 연락을 간혹 주고받던 그 친구에게, 오래된 과거의 내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I found the letter that I wrote to you when we were in Malaysia.

Could you read it if I send you now?



그 친구는 편지를 읽더니 추억이라는 말과 함께 답장을 보내왔다. 짧은 대화를 몇 차례 더 주고받고 우리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눴다. 이렇게 과거의 내 마음은 몇 년에 걸쳐서야 일단락 맺은 것이었다. 물론 이루어지지는 않고 결국 귀여운 추억으로 자리했지만.



오래전에 써놓은 일기 같은 것을 읽는 과정은 정말이지 가끔은 나를 놀라게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내가 이렇게나 우울하거나 혹은 행복했다고? 내가 쓴 편지 속 나는 그 친구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먼 타지에서 적응하지 못하던 날 도와준 그 친구에게, 친구도 없던 나에게 먼저 행아웃 하자고 제안해 준 그 친구에게, 다른 사람에게 웃음과 친절을 나눠줄 수 있는 그 친구에게 말이다. 그래서 글이라는 걸 쓰나 보다. 내 의식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내 기분은 어땠는지 내 정신은 어떤 상태였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두렵게 만들었던 그 파일들은 그날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또한, 궁극적으로 글이라는 것을 더욱 자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간혹, 글을 잘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쓰기 싫어질 때가 많은데 허울 좋게 잘 쓰인 글만 선호하다 보면 오히려 진심은 묻히고 거짓되거나 조작된 글들이 배출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세련되지 못하고 촌스러운 글이더라도 솔직한 게 훨씬 낫다.



노트북을 정리하면서 마주한 파묻혀 있던 과거의 내 모습. 우연히 마주한 즐거운 해프닝이었다.

아래는 내가 그 친구한테 썼던. 편지의 일부 발췌….






우리가 각자 한국, 일본에 돌아가게 되고 나서를 상상해 보면 가끔 정말 무섭다.

Sometimes, i am scared, when i imagine that we go back our own countries.

더 이상 말레이시아가 아니니까, 우린 정신없이 바쁠 거고 서서히 우리는 과거가 되겠지.

We will be busy and I become your memory, just part of your memory.

우린 10분 만에 만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매일 학원에서 만나는 사이도 아닐 거야.

and we cannot meet at the school every morning, and we cannot meet in 1 plaza. I cannot go to you by taxi just in 10 minutes.

난 정말 공허할 거야. 널 못 만나니까.

I will feel empty and lonely, because i cannot see you and you are not mine.

한국 돌아가면 너무 많이 울 것 같네.

I think i will cry too much, after I go back Korea.

우리의 앞날을 전혀 예상할 수가 없어서 너무 불안하다.

I feel nervous, I cannot guess anything about our future.

언제가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까?

When is the final day to see you and spend my time with you?

너한테 안녕을 말하게 될 날이 두려워.

I'm afraid that i have to say good bye to you.

마음이 너무 아프다.

I feel sad. It hurt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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