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기원, 정유정
1. 괴물이란 무엇인가
어릴 적 만화 영화를 보면 꼭 괴물이 등장했다. 이빨이 크고 몸집이 거대한 괴물. 소리만으로도 인간을 해칠 것만 같은 기괴한 웃음 소리와 생애 단 한 번도 마주한적 없는 외형의 무언가였다. 위협적인 그들의 몸짓은 늘 인간을 괴롭혔고, 인간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들은 늘 먼저 공격했거나 혹은 공격에 가까운 겁을 주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늘 그런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싸웠다. 만화 영화의 공식에서 괴물은 곧 인간과 반하는 것, 비非인간적인 것, 즉 인간이 아닌 것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등장했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괴물’이 주인공이었던 문학이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유일하게 연상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괴물이 서사의 소재로 쓰였을 뿐 진정한 프로타고니스트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괴물, 그러니까 더 확장된 개념의 '악인'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적도, 악인이 승리하는 어느 문학의 결말도, 나는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건 그간 문학 장르를 많이 접해보지 못한 나의 편협함 때문일 수도 있고, 문학 자체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대중에게 권선징악이라는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2. 유진, 낯설고도 친숙한
희대의 싸이코패스, 그중에서도 최고 레벨인 프레데터 유진. 그는 자신의 가족이 죽어도 아무런 슬픔을 내보이지 않는 공감 능력 장애를 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키워온 엄마를 죽인 잔인한 살인자였고, 하나뿐인 친구와의 약속까지 고민 없이 깨버리는 배신자였다. 유진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단 한 움큼조차 쥐어지지 않은 괴물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잔인하고 외로운 괴물 유진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제목 역시 파격적이다. 앞서 설명한 이 무정하고 잔인한 포식자를 <종의 기원>이라는 표현으로 압축한다. 그 많고 많았을 제목 중 ‘종의 기원’이라니.
나는 궁금했다. 작가가 싸이코패스를 종의 기원으로 삼은 그 이유를. 그리고 화가 났다. 극단적으로는 책을 팔기 위한 자극적인 상술이라고도 느꼈다. 하지만 점차 책장을 넘어가면서 알았다.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행하는 모든 움직임의 조각들은, 결국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리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는 것을. 그의 모든 행위는,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그림자'와 유사하게 닮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온갖 장에서 퍼져나오는 찝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책장을 벅벅 넘기고, 깊은 책장에 책을 꽁꽁 숨겨도, 이미 느껴버린 찝찝하고 불쾌한 여운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유진에게는 도덕적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초자아라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회가 정해 놓은 도덕의 힘이 결코 작용하지 않았다. 그는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직 ‘욕망’ 뿐이었다. 그는 욕망이라는 바다에서 끊임없이 질주하고 헤엄쳤다. 욕망을 숨기지 않고 표출한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과 완벽히 반대되는 비인간인 동시에, 인간의 원초적 뿌리 그 자체를 간직한 완벽한 인간이었다. <종의 기원>이 찝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유진은 그의 엄마가 자궁을 도려내면서까지 낳은 아이였다. 그가 태어난 최초의 집은 희생으로부터 세워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이 날카롭고 차가운 칼로 인해 베였다. 유진이라는 생명을 위해, 유진이라는 탄생을 위해. 아마도 유진의 삶은 탄생부터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욕망의 불씨는 끝없이 자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둥지와 싸웠다. 유진의 둥지는 그의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그 결과는 비린내 나는 죽음 뿐이었다.
이 소설의 끝은 그 흔한 도덕적 결말이나 교훈이 아니다. 그저 유진만이 남았다. 그의 생존은, 곧 인간의 근원인 ‘악’이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시간이 흐른들 여전히 곳곳에 살아남은 악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거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 허나 모든 인간 각자의 안에 있는 것. 어쩌면 괴물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운치 않은 찝찝한 기분이 깊숙한 어딘가에서부터 다시 솟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