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진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윤태호 작가는 결핍으로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을 가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그를 '교양'을 다루는 만화가로까지 이르게 했다고. '교양에 대한 만화책이라니 너무 고루하고 재미없잖아', 라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긴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몇 자 안 되는 말들이 너무 슬프고 괴롭고 아파서 나는 그저 입술을 달싹였다. 윤태호 작가는 오리진을 '교양 만화책'이라고 포장하지만, 이 책은 어쩔 수 없는 철학책이다. 따뜻함을 잃어버린 인간, 서서히 식어가고 있는 인간. 그래 맞다. 인간은 차가워 지고 있는 게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따스함을 잃어가고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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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01 보온
오랜만에 읽는 만화책 향기. 어린 시절, 어느 시점의 조각을 더듬는다. 장마다 녹아든 잉크 냄새가 좋아서, 나는 한참을 킁킁 거린다. 다부진 선들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저 세계와 달리, 프레임 바깥의 현실은 귀찮고, 낡았고, 무척, 늙었다. 망가질대로 망가진 몸에 얼마 남지 않는 체력을 있는 힘껏 불어 넣는다. '나 대신 출근하는 로봇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구절에 웃픈 공감을 느끼며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가, 이내 이어지는 윤태호 작가의 뼈 있는 말에 월요일 아침이 불안하게 요동친다. 그러게 말야. 우리의 내일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우린 어쩌면 가장 발달된 사회 속에서
가장 소외된 존재는 아닐까.
우리가 만든 합리적 시스템에서
가장 불합리한 존재가 돼버린 것은 아닐까.
그들은 알아냈다. 점점 인간은 텅 비어버린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놓쳐버린 것은,
놓아버린 것은 무엇일까?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삶의 의지는
지적인 것, 감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가시적인 것, 묵시적인 것들이
뒤엉켜 일어나는 혼돈의 것이다.
어쩌다 생겨난 것인지 모르는 내가,
어째서 살고 있는지 모르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있는가?
삶이란 버티는 것도 아니었고, 견디는 것도 아니었다. 미래는 싸워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었다. 자연 앞에 인간이 무력하듯, 시간 아래 인간은 영악했으나 여전히 연약했다. 인간은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 없었으나, 시간은 인간을 홀리고, 또 흘려 보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그 불안의 오한을 쓰다듬어줄 따스한 온도 뿐이라는 것을. 그걸 몰랐던 나는 애꿎은 것들을 탐했다. 달콤한 것들, 반짝거리는 것들, 예쁘고 멋지고 훌륭한 것들. 그들이 나의 불안감과 무력감을 해소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따스함'이 없다면, 그것들은 그저 찬란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선선한 바람마저 매서운 칼처럼 시리게 느껴진다. 차갑게 얼어 붙은 나의 세상에게 여태 꽁꽁 숨겨 두었던 나의 따스함을 조그맣게 올려 놓는다. 티내는 방법조차 몰랐던 나의 따스함을, 여전히 불안하고 가냘프지만, 세상의 모든 기원이었던 그것을. 괜찮을 거라는 두터운 말들로 스스로를 토닥인다. 내가 먼저 세상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곳곳의 따스함이 내게도 언젠가는 닿으리라 기대하면서. 간절하게, 조금은 찌질하게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