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비행운
스산한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희미한 가로등 사이로 얼굴 없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분명 두 발로 땅을 딛고 걸어가는 '사람'이지만, 눈, 코, 입이 없어 표정을 도통 알 수 없다. 나는 긴장한다. 목구멍까지 가득 찬 불안함이, 손끝까지 가득 찬 긴장감이 금방이라도 폭발하려 할 때 잠에서 깬다. 땀에 젖어 축축해진 베갯잇을 만지며 내심 안도한다. '꿈이었구나, 꿈이었구나.'
어린 시절, 어디선가 주워들은 달걀귀신 이야기. 가히 기괴했고 충격적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 앞을 걸어가고 있던 누군가가 달걀귀신이면 어떡하나, 초조해 했던 기억도 난다. 달걀귀신은 내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도 않을 테지만, 그는 눈이 없고 코가 없고 입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무엇을 보는지, 그가 어떤 냄새를 맡는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으니까. 나는 그의 시선을, 그의 생각을, 그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할 테니까. 소통할 수 없고 관계할 수 없는 그 대상은, 아무리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내게는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얼굴 없는 얼굴, 얼굴 없는 괴물.
몇 번 "살려주세요!"
라고 소리쳐봤지만
내 비명은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공허하게 흩어졌다.
나는 우주의 고아처럼
어둠 속에 홀로 버려져 있었다.
(비행운, 117p)
김애란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칼자국>이라는 소설이었다. 아마도 5년 전쯤, 누군가의 추천으로 우연히 집어 든 책이었다. 그는 분명 추천할 만한 사유가 있어 추천을 했겠으나 나는 그 사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자신 있는 권유와 책 제목에 끌려 아무 말 없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단숨에 읽어 내려간 <칼자국>. 그때 나는 한동안 가슴이, 손끝이, 두 뺨이 베인 것처럼 시리고 쓰라렸다. 그녀의 문체에서, 아니 어쩌면 곳곳의 행간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칼이 나를 아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서리다'는 감정이 이런 걸까, 그녀의 책을 보면서 처음 생각했다.
꽤 오랜만에 읽어 내려간 그녀의 (아마도) 두 번째 책. 이 책 역시 누군가 빌려준 책이었다. 앞서 읽은 독자의 밑줄과 접힌 자국을 좇아가며 따라간 <비행운>, 지나간 흔적이 '이건 소설이야', '그래, 이건 책이야'라고 말해주어 그나마 덜 외로웠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았던 것이라면, 이 책에 담긴 끝없는 고독과 외로움을, 아마 나는 참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저를 위로해준 건, 제가 직접 손을 뻗어 만질 수 있는 누군가의 체온이었어요. 욕망이나 쾌락은 그다음 문제였지요. 어쩌면 사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기는 그리 많은 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만하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면서요.'라고 소설 속 인물은 말했지만, 사실 그마저도 가냘픈 허세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위치가 초라할수록 풍선처럼 허풍을 떤다'는 그녀의 문장에 격하게 공감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작고 조그맣지만, 그와 반비례하게 그들에게 주어진 외로움의 크기는 우주만큼 거대하고 광활하다. 외로움이란 인간의 탄생 직후부터 시작되는 것. 그래서 마땅히 짊어지고 가야할 운명 같은 것.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외로움이 나 혼자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 '세계는 원래 그렇게 '만날 일 없고' '만날 줄 몰랐던'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이 돼' 있어 그나마 우리는 서로를 지탱하며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여전히 시큰한 그녀의 문장에 책 장을 넘길 때마다 손끝이 베이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 역시 아리고 매웠다. 추운 날씨 탓일까, 아니면 인간의 고질적인 외로움 탓일까. 늘 곁에 있던 외로움이 어느덧 거대한 그림자처럼 커졌다. 책에서 만난 고독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잠시 고개를 들어 세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세상은, 그녀의 글처럼, 아니 어쩌면 그녀의 글보다도 더 고독하고 차가웠다. 차갑고 깊은 물 속처럼, 낯설고 머나 먼 타지처럼, 조용히 우글 거리는 벌레들의 소굴처럼. 표정 없이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 시끄러움 속에 가려진 허공의 것들. 어쩌면 달걀귀신은 누군가 그냥 만들어낸 기괴한 설화나 괴담이 아닐지도 몰라. 문득, 악몽에서 깼던 여느 밤의 순간처럼 손끝이 축축해졌다. 지금 여기 이곳의 세계는 희망일까, 절망일까. 나를 위로해줄 조그만 온기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누군가를 안아줄 조그만 따스함이 내게는 남아 있을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어찌됐든, 어차피, 내일도, 나는 외로울 테니까.' 여전히 시리게 부는 바람에, 나는 몸 어딘가를 칼에 베인 것처럼 아리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