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가는 길

13시간 짜리 헛소리

by 분더비니



출국 전날 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과 송년회를 했다. 송년회라고 해서 어떤 특별함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제 곧 새해가 다가온다는 이슈만이 이 모임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줄 뿐. 시답잖은 이야기를 안주 삼아 얼마 남지 않은 연말의 시간을 꾸역꾸역 집어 삼킬 뿐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언젠가부터 사람을 만나면 나와 상대의 관계를 어림잡아보기 시작한다. 나는 이들과 얼마나 오래 함께일까,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우리일 수 있을까. 사람 관계에 힘 쏟는 게 피곤해서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무심함이 두려워서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래 함께 걸어갈 이들이라는 뜨뜻한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리는 편안했다. 생각보다 편안하게 모임을 가진 뒤 집에 돌아가는 길, <생각보다 편안한>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자의적인 의미와 각기 다른 경험이 녹아드는 것인지 곱씹어 보면서.






평소보다는 잠을 조금 덜 자긴 했지만,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눈이 반짝 떠졌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한 기상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긴 시간의 비행, 먼 나라로의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덜 상기됐고, 덜 떨렸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여행. 나는 늙어버린 걸까, 마음조차 낡아 버린 게 이닐까, 싶은 구질구질한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이내 곧 좀 그러면 어때! 싶은 마음으로 당차게 발길을 옮겼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은 추웠고 조용했다. 오랜만에 찾은 인천공항. 서둘러 수속을 마치고 동생과 함께 카페에 들러 빵과 커피를 샀다. 소시지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단 하나의 의심도 없이 소시지 빵을 향해 다가가는 동생의 손짓이 신기했다. 의아스러운 눈초리를 거두기도 전에 이내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양심도 없이 자연스럽게 소시지 바게트의 한 입을 훔치며 미리 다운 받아둔 <기초 스페인 회화> 어플을 켰다.


스페인이라 하면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을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들의 언어도 역시 그랬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정류장이 어디에 있나요? 아무리 듣고 들어도 외딴 느낌은 영 익숙해질 기미가 없었다. 꼬불꼬불 뒤엉킨 그들의 말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알아듣고 기억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마디였다.




Gracias, gracias.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말, 그리고 건넬 수 있는 유일한 말. 물끄러미 단어를 보며 생각했다. 불평과 불만이 많았던 한 해, 그간 나는 이 단어를 참 잊고 지냈구나 싶었다. 2017년의 끝자락이 주는 연말 버프에 힘입어 나는 다짐했다. 한 번도 발 디뎌본 적 없는 그곳에서, 모든 게 다 낯설고 외딴 그 땅에서, 부디 내가 잃어버린 '감사함'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평소보다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표현할 거라고. 일기장을 꺼내 gracias라고 꾹꾹 눌러썼다. 그것도 두 번이나. 꼭꼭 새기고 또 되새기겠다는 다짐으로.





처음으로 비행기가 고래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운 결, 우람한 몸체와 거대한 굴곡들. 그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또 설레는 존재들이 아닐까. 높은 하늘을 비밀스럽게 가르는 비행기의 모습은 깊은 바다를 비밀스럽게 가르는 고래를 꼬옥 닮았다. 나는 어리숙하게나마 그 모습을 옮겨 담고, 하늘을 나는 고래, 라는 썩 오그라드는 제목을 붙여주었다.










나는 비행 중에 기내식 시간을 제일 좋아하는데, 그건 밥도 밥이지만 그 밥을 배식받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다. 승객들은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승무원이 건네는 티슈로 손을 닦는다. 그리고는 앞줄부터 차례대로 얌전하게 음식을 받는다. 시선을 나름대로 고정한 채 군말 없이 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게 재밌다. 만약 승객들이 기내식 먹는 모습을 항공뷰로 볼 수 있다면 흡사 타이쿤 게임이 연상될 것 같다. 승무원 타이쿤 같은 느낌적인 느낌



저는 사과쥬스여 사과주스 사과쥬스는 최애니까 클로즈업






영화를 보다가 책을 조금 읽다가, 작은 노트와 펜, 키보드를 펼쳐 놓고 수많은 말과 글자를 뱉어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투박하고 규칙적인 소리가 좋아서, 괜히 한 자 쓸 것을 한 줄 더 쓰고, 한 줄만 쓸 것을 또 또 써 내려가다가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키보드를 톡톡 건드린다. '고도 12,192m에서는 아무도 내 얘기를 못 듣겠지.' 싶은 마음에, 꼭꼭 숨겨놓았던 모든 말을 입술 밖으로 읊조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허공으로 날린다'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뱉은 말들은 사실 그 어디도 쉬이 사라질 수가 없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사이에, 잔뜩 오므린 승객의 다리 밑에, 모든 걸 빨아들일 듯 괴력을 보여주는 더러운 변기 속에, 가득 메워진 답답한 공기 안에 파묻히고 달라붙어 그저 끔뻑끔뻑 숨을 내쉰다.


그렇게 짧은 숨을 내뱉는 말들이 좀처럼 하나의 것으로 꿰매지지 않아 답답했다. 글자의 획들이 요란스럽게 부딪히다 끊어진다. 이건 다 비행기 공기가 건조해서야, 라고 괜히 비행기 탓을 한다. 복잡한 글자를 가득 머금은 나의 비행을 형용사로 표현한다면, 과연 어떤 단어가 가장 어울릴까.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말들의 무게에 지친 나는 결국 잠에 빠지고 만다. 더없이 더디고 느리고 아득하기만 한 비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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