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해피 뉴이어 인 스페인

by 분더비니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로 향하는 비행동안 내내 글을 또 쓰고 썼다. 그리고는 애써 가득 쓴 글들을 실수로 지워버렸다. 허무했다. 또렷한 감정의 굴곡이 담겼던 자기 고백이었던지라, 이 글은 꼭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키보드를 다시 펼쳤다. 그때 알았다. 대개 떠나간 것들이 그렇듯이, 지나간 글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다시는.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는 야트막한 언덕 위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바닥은 평평한 아스팔트 대신,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붙여 만든 아랍식 길이었다. 단 하루를 머무는 그라나다의 밤, 그 밤이 아까워 부지런히 걸었다. 버스를 잘못 탄 탓에 한참을 걷고 헤매며 만난 그라나다의 아름다운 야경




불이 난 것처럼 불빛이 담뿍 일렁이는 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발걸음을 돌리기가 어찌나 아깝고 아쉽던지.

아쉬운 마음으로 하산하는 길, 걸음걸음마다 뾰족한 돌이 발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가로등도, 사람도 하나 없는 어두운 골목 어귀에서 한 스페인 사내는 술에 취했는지 소리를 질렀다. 나에게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나는 괜히 무서운 기분으로 주머니 속 두 손을 꽉 쥐었다. 인간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곤 한다.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숙소 앞 넓은 공원에 소박하다고 말하기에는 크고, 웅장하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크기의 분수가 파랗게 솟고 있었다. 분수라는 게 대체 어떤 개념과 목적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고 (물은 원래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것이 그 특징이니까.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 것은 물의 자연적 습성에 반하는 것이니까), 아무도 다니지 않은 고요한 밤 거리에 홀로 화려하게 물을 뿜어내는 분수의 존재 이유가 궁금해졌다.




너는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자연의 힘을 거스르고 있는 걸까. 보는 이 하나 없는 이 외로운 밤에 어찌 그리도 화려하게 춤을 추는고 있는 걸까. 나라도 그 외딴 몸짓을 응원해야겠다는 생각에 한참을 서서 분수를 바라봤다. 시원하게 솟았다가 명랑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끝에 무겁고 슬픈 마음을 날려 보내며.






Feliz año nuevo!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행을 하면서 새해를 맞았다. 스페인보다 더 빨리 새해를 맞는 지인들에게 감개무량한 연락이 왔다. 나의 고생한 한 해를 대신 위로해주고, 지친 나의 한 해를 대신 토닥여주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과연 이런 과분함을 받아도 괜찮은 사람인가,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떻게 변화하겠다는 다짐은 퍽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규칙적인 운동을 하지 못할 테고,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할테며,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철 없는 아이이겠거니. 이렇게 자조섞인 자기 비판을 하고 나니, 새해 다짐이나 반성을 떠올리는 행위 자체가 다소 멋쩍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대신 올해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나에게 덜 미안해 하기. 나에게 덜 실망하기. 나에게 덜 집착하기. 나에게 덜 기대하기. 내 삶의 무게가 조금은 홀가분해지기를 바라며,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다가올 것은 다가오는 그대로. 해피 뉴이어, 인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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