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시간] 작은 만남, 오래 남는 온기

by 박웅

토요일 아침, 거울 속에서 흰 실 한 올이 눈에 띄었다. 그 한 올이 염색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궂은 날씨라 차를 타고 나가기도 망설여졌다. 그래서 숙소 근처, 걸어서 갈 수 있는 미용실을 찾아보기로 했다. 평점도, 리뷰도 없었다. 그저 동네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십 분 안에 하나쯤은 있겠지 싶었다.


첫 번째 미용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안은 오래전에 닫은 듯, 의자 위에 먼지가 얹혀 있었다. 조금 더 걸어 두 번째 가게 앞에 섰지만, 그곳도 ‘휴업’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알루미늄 문, 빛바랜 격자무늬 필름, 오래된 드라이기. 조심스레 문을 밀자, 작은 종이 맑은 소리를 냈다.


가게 안에는 두 분의 어르신이 앉아 계셨다. 낯선 손님을 보자 살짝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저… 혹시 염색이 되나요?”

원장으로 보이는 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셨다.

“그럼요, 됩니다.”


의자 하나, 샴푸대 하나, 손바닥만 한 공간이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어릴 적 동네 미용실 냄새가 떠올랐다. 비누 냄새와 약간의 염색약 냄새, 그리고 오래된 드라이기의 바람 냄새.

“노란색으로 할까요?”

뜻밖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아뇨, 그냥 까만색으로요.”

그러고는 곧 후회되어 다시 말했다.

“혹시 짙은 갈색은 없을까요?”

원장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젊은 분이 왜 까만색으로 하나 했어요.”

말끝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염색약을 바르는 동안 옆자리 어르신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요?”

“대전이요.”

“혼자 왔어요?”

“네, 잠시 연수 중이에요.”

“결혼은 했구?”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네, 애가 대학생이에요.”

“에에— 젊어 보이네. 마흔쯤인 줄 알았어.”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


드라이를 마친 뒤 원장님이 거울 속 내 머리를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색이 참 고와요. 아주 잘 나왔네.”

그 말 한마디가 하루를 이상하게 기분 좋게 만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저녁빛이 번지고 있었다. 허기가 느껴져 근처 라면집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두 개, 의자 여섯 개.

주문은 단출했다. 라면과 햇반. 라면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단무지가 쟁반 위에서 반짝였다. 식당 안엔 나 혼자였다. ‘내가 나가면 텅 비겠구나’하는 생각에 라면을 하나 더 시켰다. 그때 주인할아버지의 얼굴에 놀람과 미소가 동시에 번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미용실 불은 꺼져 있었다. 아마 내가 그날의 마지막 손님이었을 것이다. 짧은 인연, 한 끼의 식사, 소박한 대화 한 줌이 남긴 하루.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이었지만,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이런 작은 순간들이 더 오래 남는다. 한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들이 이제는 마음에 길게 번진다. 시간이 사람을 무디게도 하지만, 동시에 더 섬세하게 만든다.


삶이 깊어진다는 건, 이런 사소한 만남 속에서도 따뜻함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스쳐간 하루가 오랜 뒤에도 마음을 데워준다면, 그게 바로 세월이 내게 남긴 가장 고운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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