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조천읍의 바닷가. 가을 초입의 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었다.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며 흰 거품을 뿜어냈고, 짙은 짠내가 공기 속에 섞여 들었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마음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바람은 머리칼을 흩날리고, 옷자락을 흔들며, 내 안의 긴장까지 풀어주는 듯했다.
그 순간, 문득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던 바람이 불면 나는 늘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사람들의 시선을 불러올까 두려웠다. 그때의 바람은 시원함이 아니라 불안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늘 예민했다. 바람이 불면 머리칼만 아니라 마음까지 뒤흔들렸다. 주변의 시선 하나,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렸던 나였다. 그래서 그때의 바람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제주에서 맞는 바람은 다르다. 여전히 세차게 불고, 여전히 머리칼을 헝클어뜨리지만 이제 그 바람은 내 안의 매듭을 풀어준다. 나뭇잎을 흔들고, 파도를 일렁이게 하며, 내 안의 집착까지 흩날려 보낸다. 젊은 날의 불안과 복잡함을 닮았던 바람이 이제는 여백과 평온을 닮은 벗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닮아간다는 건 그런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내게 맞춰 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의 결을 이해하게 되는 일. 같은 바람 속에서도 다른 풍경을 듣게 되는 일.
젊은 날의 나는 바람을 막으려 했지만 이제는 그 바람 속에 잠시 멈춰 선다. 머리칼이 흐트러져도 좋다. 흐트러짐 속에서 마음이 정리되는 순간이 있으니까.
바람은 여전히 불고, 또 불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내 마음의 결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세월이 불어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닮아간다는 것은 바람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바람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 같은 소리 속에서, 나는 다른 나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