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찰옥수수, 씹을수록 드러나는 것들

by 박웅

늦여름의 오후, 아내가 단지 앞 트럭에서 삶은 찰옥수수를 사왔다.

“어제 오빠가 맛있어 보인다고 하길래 사 왔어. 잘했지?”

그 말에 웃으며 옥수수를 하나 받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껍질 사이로 번지는 구수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한입 베어 물자 뜨거운 김이 터지며 단맛이 천천히 입안에 번졌다.


“잘했네. 맛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웃음 속엔 약간의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어렸을 땐 이런 건 입에도 안 댔는데…”

그 말과 함께 오래전 여름이 눈앞에 펼쳐졌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면 가족은 늘 외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넓은 마당, 그 끝의 밭, 그리고 밭 너머로 흐르던 개천. 개천에서 놀다 돌아오면 외할머니는 갓 따온 옥수수를 큰 가마솥에 삶아 주셨다. 솥뚜껑을 열면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그 사이로 샛노란 옥수수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늘 그 노란 옥수수를 골랐다.


알갱이를 베어 물면 탱글하게 터지며 단물이 혀끝에 퍼졌다. 그 달큰한 맛은 여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옆에 놓인 찰옥수수는 늘 외면했다. 치아에 들러붙는 찐득함, 식으면 딱딱해지는 알갱이, 목을 막히게 하는 답답함까지. 어린 시절의 나는 단맛만을 사랑했고, 오래 씹어야 맛이 드러나는 것은 늘 불편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찰옥수수를 기다린다. 식감의 탄력 속에서 천천히 스며드는 단맛, 씹을수록 고소해지는 여운이 좋다. 어릴 땐 단번에 터지는 맛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오래 머무는 맛에서 더 큰 기쁨을 느낀다.


노란 옥수수는 사라졌지만, 대신 새로운 맛이 생겼다. 쫄깃하게 씹히는 결, 입안에 남는 달큰한 잔향, 그 모든 게 삶의 리듬과 닮아 있었다. 단번에 터지는 기쁨보다, 오래 씹을수록 드러나는 충만함.


돌이켜보면, 입맛이 변했다는 건 단순한 감각의 변화가 아니다. 금세 사라지는 단맛에서, 오래 남는 여운으로 옮겨온 일이다. 젊은 시절엔 빠르게 삼키는 게 익숙했지만, 이제는 천천히 씹으며 그 안의 결을 느낀다.


찰옥수수를 한 알 한 알 씹을 때마다 나는 안다. 삶이 깊어진다는 건, 단맛을 좇지 않고 씹을수록 드러나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 느린 충만이 내 인생의 맛을 조금 더 단단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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