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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선아 Feb 06. 2023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2. 40년 전 아빠의 일기(를 빙자한 연애편지)


1980년 8월 16일 토요일 3시부터-


‘다만 당신을 좋아해요. 밖에 계속 비가 오고 있어요.’


진심을 바쳐 사랑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진실되길 빌었는지. 수많은 시간을 고통에 애태우며 작은 가슴 쓸어안아야 했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지루했던 하루의 피로를 전화 한 통에 잊어야 했던 우리.      


수많은 시간을 묻어가며 매달리던 광화문 전화통. 싸늘하게 얼굴에 묻혀오던 광화문 새벽 공기들. 자정이 다 된 충무로 거리에서 차를 기다리던 나. 전화 한 통에 한 푼 없는 주머니를 너털거리며 퇴계로 거리를 내달리던 나. 12시가 넘은 왕십리 골목을 걷던 나날의 나. 헤어져야 한다는 아픔에 머릿속 깊이까지 새벽비로 적셔가며 돈암동을 미아리까지 연결시키며 울먹거리던 바보 같은 나. 찾아가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12시를 넘기지 못해 내동댕이 치고 신설동 네거리를 내지르던 나. 정들었던 신설동~왕십리 길가에 깃든 흰 눈들. 작은 두 바퀴에 몸을 내맡기며 몇 분 남지 않은 시간을 안타까워하면서 숨을 거칠게 만들던 나. 너의 창가에 불이 꺼지길 빌면서 왕십리 골목을 서성이던 나. 너의 집에 조용한 소음을 남기며 자동차의 바퀴가 멀어져 가길 빌면서 추위를 잊어야 했던 나. 수많은 순간순간 자존심을 떨쳐내며 작은 가슴 애태우던 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을 고통에 떨며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진실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형제, 부모, 친우마저 모른 체 해가며 현실을 외면한 채 무분별하게 좋아했던 내가 죄라면 죄겠지요. 희. 당신이 만들어 놓은 작은 오선지 위에 행복의 멜로디를 엮을 수 없는 내가 안타깝습니다. 미미한 존재니까요.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꿈, 이상, 욕망마저 잃어버린 채 단지 작은 행복만을 추구하던 못난 놈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해 주셔야 해요. 남자가 가질 수 있는 명예욕의 시간적 욕망마저 시들게 해 버린 당신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활기찬 시기를, 꿈의 시간을 당신과 더불어 지새워 버렸습니다. 지금의 나에게서 당신의 존재를 빼고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아직 펴보지 못한 봉우리를 그대로 간직한 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루에도 몇 번씩 작은 가슴을 모질게 채찍질하는 못난 놈의  진실을 아십니까. 겁 없이 저질러버린 불쌍한 놈의 죄와 대가를 너무 아프게 하지 마세요.     


진심으로 나란 존재를 사랑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인가요. 조금 있는 미련한 정 때문인가요. 뛰어나지 못한 놈이 가질 수 있는 현실의 물음입니다. 당신의 말대로 지금까지 해준 거 하나도 없고 희야를 위해 해놓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탓한다면 작은 몸 의지 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피곤하고 외로울 때 좀 더 편안한 안식처가 될 수는 없는지. 이해해 주셔야 해요. 이 못난 놈의 현실. 나의 전부를 말입니다. 멋도 알고 돈도 알고 놀 줄도 알고 사랑할 줄도 아는 작은 가슴 자꾸 짓누르면 터져요. 과연 희야는 나를 얼마나 알고 이해해 줄 수 있는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을 알고는 있는지. 과연 우린 그동안 몇 번의 꿈을 즐겼으며 행복된 순간이 몇 번이나 되었나요. 칙칙하게 짓누르고 있는 나와 희야의 현실...     


똑똑지 못한 제가 현실을 이렇게 만들었겠지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고민은 무리인가요. 하지만 현실을 너무 회피하지 말아야지요. 희야의 현 위치. 나의 현실을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의논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돼요. 나에게 몇 번이나 의논하고 생각을 같이 했는지 손꼽을 수 있겠어요? 그만큼 우리 사이는 무언가에 가리워져 있어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지루한 세월이 중심에 있어야 할 때문인가요. 어차피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면 믿어야 하지 않겠어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또한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해야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좋은 것은 없지만 머리카락 하나라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피우지 못한 봉우리들을 위해 피울 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지요. 현실의 오늘이 고달프고 짜증스러워도 마음을 밝게 가지세요. 부탁입니다. 무리한 부탁일까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해해 준다면 몇 년의 늦은 현실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순 없는지요. 이런 말을 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미워해도 당신만은 사랑해 주리라는 마음을 믿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너무 흔해요.          

     






#2-1. 40년이 지난 아빠의 일기를 읽고. 과거와 현재의 아빠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 


2023년 2월 6일


'대체 사랑이 뭐길래.'


아빠.      


80년의 여름엔 비가 많이 내렸나 봐요. 눈보라 속 역마차가 그려진 아빠의 일기장엔 자주 비가 옵니다. 그즈음 아빠의 마음에도 큰 장마가 지나고 있었네요.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피어난 먹구름이 왕십리부터 신설동까지 빼곡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차비가 없어 서로를 만나기 위해 걷고 또 걷던 그 길 위에. 통금 시간에도 간절하게 헤매던 두 사람의 발밑에 질척이는 현실이 달라붙어 버렸습니다.      


지독한 삶이 에워싸는 암울한 슬픔과 좌절이 몰고 오는 절망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요. 사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때로 사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생의 동력이자 사의 동력이기도 하지요. 그 어떤 순간에도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랑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요. 가진 것이 없어 움켜쥘 수 없는 손가락 사이로 사정없이 빠져나가는 한 사람이 얼마나 애달팠을까요. 가난이 집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창밖으로 도망간다는 말을 믿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는데, 살아보니 그 말은 영락없이 진실입니다. 어째서 사랑은 순결한 듯 해사한 모습으로 찾아와 제일 먼저 도망치는 것인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동시에 가장 위태롭고 치사하며 가장 이타적이고 이기적인 행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동안은 사랑이 세계의 전부를 차지하고 마니까요. 자책, 원망, 수치, 지나친 괴로움의 속에서도 놓칠 수 없는 희야에게 ‘나의 전부를 이해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사정하는 심정을 짐작해 봅니다.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긴 했느냐고 불안에 떠는 질문을 건네는 마음에 대해서. 힘든 현실을 같이 견디며 밝게 웃어달라고 절실하게 부탁하는 부끄러운 한 남자의 과분한 요청을요. 희야를 사랑하는 일이 이토록 죄의식을 수반하는 일인 줄 알았더라면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둘의 사랑이 40년이 지나 진짜 일상이 되고 현실이 되어 오히려 더 나쁜 죄를 짓고 싶어 진다는 걸. 흔하고 지루한, 가끔은 넌더리 나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결말을 알았다면요.     


저는 이제 사랑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어요. 나와 너만으로 가득한 세상이 얼마나 허약한지 많은 시간 경험했답니다. 뿐인가요. 한낮 사랑 따위보다는 가정의 안위를 우선해야 하고 가족들을 위해 헌신할 준비로 몸과 마음이 무장되어야 하는 시기죠. 하지만 여전히 저는 꿈을 꾸곤 해요. 사랑에 전부를 맡기고 바짝 마른 오선지에 행복의 멜로디가 폭포처럼 흐르는 꿈을요. 멋도 알고 놀 줄도 알고 사랑할 줄도 아는 남자의 딸이잖아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때때로 드라마나 웹툰에 빠져 삽니다. 사랑과 사랑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들로요. 결핍된 욕구를 어떻게든 채워 넣기 위해 자꾸만 허상의 사랑을 들이붓습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아빠가 엄마 대신 컴퓨터 안으로  찾아 들어간 것과 같이요.    

 

저는 알아요. 나와 아빠는 계속해서 사랑을 추구할 것입니다. 언제 까지나요. 모순 그 자체이자 결국엔 부스러지고 말 그 사랑을. 완전함을 결코 믿지 않지만 추구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아빠와 내가 가장 닮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점일 겁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요. 내 전부가 통째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마음을,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일을 영원히 염원하는 일. 아마도 다른 누구 아닌 지금 함께 있는 사람에게요. 그래서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갈구하고 거절당하면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사랑한단 말은 할 수 없지만 언제든지 사랑하기 때문에요.       


사랑이 대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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